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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노림수와 경우의 수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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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C] 노림수와 경우의 수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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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첫 형사재판 오후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전 대통령이 14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내란 우두머리 혐의 첫 형사재판 오후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고 있다. 연합뉴스


야구 경기를 즐겨 본다. 때로 베테랑 타자가 나왔을 때 “노림수가 좋은 선수”라는 평가와 함께 기대감을 표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투수의 구위나 볼 배합이 좋아 타격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경험 많은 타자가 특정 구종과 방향을 예측한 ‘노림수’로 때려 낸다는 설명이 따라붙곤 했다. 물론 타자가 노린 대로 공이 오란 법도 없고, 어이없는 헛방망이질을 하는 모습도 나오지만 팬 입장에선 기대하게 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3일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도 이런 ‘노림수’가 아니었을까. 자신이 임명하고 믿었던 정부 요인을 잇달아 탄핵소추해 직무정지 상태에 놓이게 만들고, 정부 예산안을 비토하거나 정부 기조와 다른 법안을 계속 통과시키자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노림수로 ‘계몽용’이라거나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 계엄을 노렸다는 윤 전 대통령 주장을 보면 이런 해석이 가능할 법하다.

계엄 직후만 해도 곧장 단죄를 받을 것만 같던 윤 전 대통령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건 공수처의 '요상한' 노림수 탓이었다. 처음엔 서울서부지법에 윤 전 대통령 체포·구속영장을 청구해 논란이 불거졌다. 법리적으로 가능하다곤 하지만, 관할 법원에 영장을 청구하지 않은 것이 ‘짜고치기’ 의혹을 부채질했다. 이어 ‘공수처+검찰’의 구속기간이 부적법했다는 이유로 구속취소 결정이 내려지자 윤 전 대통령 측 기세는 계엄 전 수준으로 되살아났다.

게다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최종변론 이후 선고까지 예상보다 오래 걸리자 온갖 ‘경우의 수’가 난무했다. 만장일치 인용 여론은 간데없고, 인용 대 기각 또는 각하 예상 수치는 7:1에서 6:2, 5:3으로 내려가더니 선고 전날엔 4:4설이 돌아다녔다. 법조계, 정치권, 그리고 회사에 다니는 지인들까지 경우의 수에 대해 물었지만, 도청 방지장치까지 설치된 밀실 안 재판관 8명의 논의를 파악할 재간이 있을 리 없다. 상식선에서, 예측 가능한 범주에서 ‘이번에 탄핵이 이뤄지지 않으면, 대통령이 되는 누구든 군을 동원해 무력시위해 놓고 경고라고 하면 면죄부를 받을 것’이란 얘기만 할 수 있었다.

결국 윤 전 대통령의 노림수는 최악의 수가 됐다. 헌재는 ‘경고성·호소용 계엄’이라는 주장을 물리치면서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제 더 이상 노림수니, 경우의 수니 하는 건 스포츠 분야에서가 아니면 보고 싶지 않다. 법치라는 게 예측 가능한 범주 내에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국가폭력의 사용을 제한하기 위해 도입된 우리 모두의 약속이 아니던가. 넷플릭스 드라마 ‘제로데이’에 “신속한 결과보다 더 중요한 건 모두가 믿을 수 있는 결과”라는 대사가 나온다. 상식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