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1년 청나라 궁정화가가 그린 만국래조도(万国来朝图)의 부분도. 숭경황태후(건륭제의 모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각국, 번부 사신들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했다. 맨 아래 포르투갈 사신단, 그 위에 코끼리를 탄 인도 사신단, 그 위로 관복과 사모 차림의 조선 사신단이 보인다. 위키미디어 코먼스 |
조선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급격한 사회변동을 겪었다. 특히 7년에 걸친 두 차례 왜란은 조선과 일본뿐 아니라 명과 여진족까지 휘말려 동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국제전이었다. 전쟁은 이미 국운이 쇠한 명나라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고 결국 청나라로 왕조가 교체됐다. 일본에선 에도(오늘날 도쿄)에 근거를 둔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섰다.
조선으로선 짧은 시기에 잇따른 외침과 전란은 참혹한 비극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새롭고 특이한 문물과 지식·정보의 교류가 폭발적으로 급증한 계기가 됐다. 그즈음 유럽에선 지리상의 발견이 촉발한 대항해 시대가 열렸고 과학혁명이 세계관의 대전환을 가져왔다. 서구의 급격한 팽창은 동아시아 3국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한문학자 진재교 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의 신간 ‘지식과 조선’은 격변의 시기 조선이 선진 문물과 지식을 수용한 과정과 양상을 풍부한 문헌 기록으로 톺아보고 그 사회사적 의미를 파악한 역저다. 국경 안팎에서 견문·체험·독서를 통한 지식과 정보의 획득, 그 축적 방식과 다양한 저술들, 사대부 지식인 계층과 중인 계급이 지식정보의 생산·유통·소비에서 보인 차이점 등을 촘촘히 살폈다.
지식과 조선 l 진재교 지음, 성균관대학교출판부, 4만3000원 |
지은이가 조선 후기 견문과 체험의 통로로 집중한 건 이웃 국가들에 보낸 외교사절, 즉 사행(使行)이었다. 전란이 끝난 뒤 조선은 신흥강국 청에는 연행사, 일본에는 통신사를 보내 교류를 재개했다. 그들이 신문물을 접한 놀라움은 무척 강렬했다. 연행사들은 임무를 마친 뒤 ‘연행록’을 남겼는데, 여기에는 노정의 체험과 견문, 이국의 다양한 풍물과 지식 정보, 개인적인 감상과 잡기까지 다양한 기록이 담겼다. 문신 유만주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일찍이 연경(베이징)에 다녀온 사람이(…) 이루 다 말할 수 없고, 글로 이루 다 적을 수 없으며, 그림으로도 이루 다 그릴 수 없다고 하기에는 지나친 말로 생각했는데, 직접 체험한 후에야 그것이 넘치는 말이 아님을 알았다.”(흠영원본, 1775~1887)
조선 후기 새로운 지식·정보의 확산에 가장 기여한 것은 서적의 대량 유입과 유통이었다. 당대 사대부 지식인들은 다양한 독서 체험을 자신의 저작에 활용했다. 청조(淸朝)에서 유입된 서적들은 전례 없이 새로운 지식과 정보가 풍부했다. 이를 선취하는 것은 공론의 장에서 새로운 무기를 지닌다는 의미였고, 이는 정치적 영향력 강화와 직결됐다. 특히 한양에 살면서 권력의 핵심을 형성한 경화세족은 청에서 들여온 서적으로 가문의 컬렉션을 만들고, 자신만의 장서로 신지식을 흡수하고 생산했다.
17세기 이후 사대부 지식인들의 글쓰기에 차기(箚記)와 유서(類書) 필기가 유행한 것도 관심을 끈다. 차기는 “문인학자가 특정 사안을 주목해 간단히 적어놓은 독서 후기나 비망록”이다. 차기체는 엄격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하고 순발력 있게 새로운 지식 정보와 단상을 메모하고 “축적된 결과물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분류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차기체는 또 “관념의 사유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물과 물질의 세계를 사유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유서는 그렇게 집적된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재배치한 것으로 “세상 지식·정보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자 하는 의식하에 기술된 경우가 많”았다. 이는 볼테르·몽테스키외·루소 등 18세기 프랑스의 백과전서파 지식인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수광이 세 차례 사행 경험으로 획득한 당대의 지식과 정보를 망라한 ‘지봉유설’(1614년)은 유서의 전형이다. “그는 우주→자연현상→지리→국가제도→인문→인간→의식주→동식물 등의 체계를 염두에 두고 이를 25부로 분류하고 이를 다시 구체적인 항목으로 배치”해 다양한 표제어들을 설명했다.
신곤여만국전도. 1602년(선조 35) 이탈리아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중국 베이징에서 제작한 것을 1708년(숙종 34) 조선에서 모사한 세계지도. 남양주 실학박물관 소장 |
신지식과 이문화 수입에는 중간 계급의 구실도 컸다. 통신사행에는 양반 관료뿐 아니라 서얼과 역관(통역관)도 제술관과 서기로 동행했다. 사절단의 건강과 의료를 돌볼 의원도 있었다. 이들은 사대부 지식층과는 다른 종류의 신문물에 관심을 갖고 직접 기록을 남겼다. 문신 정두원은 명나라 말기에 사행을 갔다가 유럽 출신의 관리 육약한(본명 로드리게스)을 만나 교류하고 천리경·홍이포·자명종·염초화 등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왔는데, 둘의 만남을 주선한 이는 역관 이영후였다. 이영후는 육약한에게 천문학과 역법 등에 관한 책을 선물 받은 뒤 보낸 편지에 “우매한 저를 깨우쳐 개명의 경지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서양인이 천도에 깊고 정밀함이 고금을 통틀어 특출하여(…) 감탄합니다. 부럽고 부럽습니다”라고 썼다.
16세기 후반 통신사들이 안경을 들여온 것은 서구 문물 보급사에서 획기적 사건이었다. 사대부 지식인이 만년에 다양한 저술을 생산한 데는 안경의 보급이 큰 몫을 했다. 문인화가 이윤영은 안경의 효용성을 ‘대학’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비유한 찬사를 썼다. “안경이 아니면 눈을 밝히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없고, 책이 아니면 마음을 밝히는 데 도움을 받을 방법이 없다. 그것을 이용하면 앎이 지극해지고 행실에 바르게 되지만, 버려둔다면 식견이 어두워지고 심지도 어지럽게 된다.” (단릉유고 권13)
16세기 국내에 처음 들어온 안경으로 평가되는 학봉 김성일의 안경 재현품. 전남 무안 초당대 안경박물관 소장. 한겨레 자료 사진 |
성호 이익도 저술의 여러 대목에서 안경을 극찬했다. “촌 늙은이 노쇠하여 눈마저 가물가물, 인력으로 늙은 눈을 젊은이 눈으로 바꿔놓는구나. (…) 책상 가득 쌓인 책 밝게 마주 대하니, 파리 머리 같은 글자도 하나하나 분별되네. 묻노니 이 물건 어디에서 얻었는가? 저 멀리 구라파(유럽)에서 처음 들여온 거라네.(…) 오호라! 이 안경은 지극한 보배이니, 그 공은 천금보다 크다 하리.”(‘성호전집’ 권4)
안경 착용은 17세기 초까지도 소수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18세기 들어 사행을 통한 대량 수입과 국내 제작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값이 싸지면서, 애초 사대부들의 독서와 학술용 도구이던 안경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오락과 놀이 공간에서도 사용할 만큼 널리 보급됐다.
책 매매 중개상인 책쾌(冊儈)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이들은 책을 팔거나 빌려주고 다양한 서적의 정보를 알려주며 책의 유통에 기여했다. 그러나 새로운 정보의 유통은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1771년(영조 47년) 청나라 주린이 지은 ‘강감회찬’에 조선 왕실의 족보가 잘못된데다 무함하는 말까지 실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는데, 이 일로 책쾌들 다수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조선의 지배계급은 “국가권력에 순응하는 지식·정보는 유통하지만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지식·정보는 검열이라는 무기로 제한”했다.
조선통신사래조도(朝鮮通信使来朝図). 1748년 일본 에도 막부를 방문한 사행 행렬로 추정된다. 일본 고베시립박물관 소장 |
조선의 지배층이 전후 수습을 위해 채택한 전략은 군신간 충의와 친족 결속을 바탕으로 종적 관계를 중시하는 신분 질서의 강화였다. 이는 조속한 사회 안정에는 도움이 됐을지언정 “학술과 문예의 장에선 갈라파고스 공간 같은 폐쇄적 양상”을 띠었다. 그런 경직성을 벗어나려는 시도가 없진 않았다. 지은이는 ‘우정의 재인식’에 주목했다. 조선의 신지식인들이 종적 질서를 넘어 횡적 관계의 윤리를 지향한 움직임에는 중국에 머물던 이탈리아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의 ‘교우론’이 큰 몫을 했다.
성호 이익은 이런 글을 썼다. “집안에 ‘교우론’이란 외국 서적이 있는데, 그 속에 ‘벗이란 제2의 나다. 몸은 둘로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벗을 사귀는 진정한 맛은 상대방을 잃은 뒤에 더욱 잘 알게 된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글을 읽어보니 진실로 뼈에 사무치는 말입니다.” (성호전집 권29)
사대부 지식인뿐 아니라 중인 계층도 ‘교우론’을 읽고 유통했다. 중인 기술직 홍신유는 일종의 독후감에서 “서양인 이마두(마테오 리치)가 교우론을 지었는데, 그 뜻이 깊고 절실하며 명확하고 알맞아서(…) 몇몇 붕우에게 주고 아침저녁으로 열람하고 서로 권면하고자 한다”고 썼다.(제이마두우론후)
조선 후기 문인화가 김득신의 ‘밀희투전’. 노름하는 사내 중 안경을 쓴 이가 보인다. 18세기 들어 안경은 상민 계층까지 널리 보급됐다.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
그러나 이처럼 활발했던 신지식·신문물 수입과 확산이 조선 사회의 근본적 변화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일본에서 ‘난학’이 형성되고 서구식 근대화가 급속히 촉진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왜 그랬을까?
지은이는 조선 왕실과 사대부 집단의 대응 전략과 강고한 권력 집중에 주목한다. 조선은 두 차례 전란 이후 국가 재건과 사회 재정비 과정에서 성리학에 기초한 수직적 정치·사회 질서를 강화했다. 이는 전후 체제와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됐지만, 횡적인 지식정보 공간의 형성에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지배 집단은 종적 가치와 질서 구축에 방해가 되는 것은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 영조의 책장수 숙청, 정조의 문체반정 같은 사건이 대표적 사례다. 서학으로 불린 천주교에 대한 국가 차원의 가혹한 박해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
사대부와 중간계층은 주로 한문을, 여성과 하층민은 주로 국문을 사용한 이중적 어문 환경도 지식·정보의 폭넓은 보편화에는 불리했다. 하층민이 경제력을 토대로 신분 상승과 한문 습득을 해도 그에 어울리는 교유와 문예활동은 불가능했다. 사회적 인식과 관습에 따른 차별이 엄연했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조선 후기 지식·정보 수용과 생성의 불균형을 지식과 권력의 관점에서 해석했다. “사대부 지식인은 자신들이 구축한 가치 기준과 사유에 부합하는 것만 받아들이고 기왕의 지식체계 안에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소비함으로써, 본디 지녔던 지식·정보를 축소 왜곡하기도 하고, 그 내부에 잠재된 활력을 억제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은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근대 사회에서 권력이 지식을 통해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을 설명한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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