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낮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경북 의성군 고운사를 찾아 경내 연수전(국가지정보물)의 방염포 부착 작업을 점검하고 있다. 그가 점검을 마치고 자리를 떠난 뒤 30여분 만에 산불 화마가 절을 덮치면서 연수전은 불타 사라졌다. 국가유산청 제공 |
‘주변 숲부터 싹 걷어내야 한다!’
‘괴물 산불’의 위력을 맞닥뜨린 문화재 지킴이들이 입 모아 내놓는 고언이다. 화마에서 산속 고찰들을 지키려면 주변 울창한 숲부터 벌채해 번질 공간을 차단해야 한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것이다.
지난 3월 말 경북 북부를 휩쓴 역대 가장 큰 규모 산불의 불길 앞에서 주요 고찰 인근 삼림은 불쏘시개 구실을 톡톡히 했다. 이 지역 교구본사인 의성군 단촌면 고운사는 지난달 25일 오후 국가보물인 가운루와 연수전을 포함한 절 전각 대부분이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국가유산청과 절이 마냥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날 오전부터 소방차가 출동해 건물 곳곳에 물을 계속 뿌렸고, 가운루와 연수전을 방염포로 둘렀다. 최응천 국가유산청장이 직접 현장에서 지휘하며 연수전의 보물 석조좌상을 포장해 이송할 준비도 마친 상태였다. 최 청장이 오후 3시30분 인근 만휴정 정자의 산불 상황을 보러 자리를 옮긴 뒤 불과 30분 만에 불기둥이 숲을 사르면서 절집들로 휘몰아쳤고, 1시간도 안돼 절은 불탄 폐허로 변해버렸다. 그나마 석조좌상을 급히 옮긴 것이 고작이었다. 거대 산불 앞에 상식적인 화재 대응은 실상 효용이 없었다. 최 청장은 “불길이 닥쳐도 떠나지 않고 남겠다고 하시는 절의 회주스님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을 보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절을 둘러싼 숲부터 바로 벌채하는 것이 산불 대책의 첩경임을 직감했다”고 했다.
가장 오랜 고려시대 건물 극락전이 있는 안동 봉정사와 미술사학자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 답사기로 유명한 영주 부석사 등도 전각들이 타지만 않았을 뿐 상황은 비슷했다. 북상하는 산불 앞에서 불길이 잦아들기만을 염원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국가유산청 간부들과 산하 연구소 직원들이 절 직원과 신속하게 불화 등 주요 유물들을 무진동차에 옮겨 이송한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조선시대 유명한 정자로 드라마 촬영지로 알려진 만휴정은 주된 불길이 정자를 빗겨간데다 전면을 덮은 방염포가 기능을 어느 정도 발휘해 전소의 위기를 벗어났다. 국민들의 우려를 산 안동 하회마을이나 병산서원은 10대 넘는 소방차가 한시간 간격으로 물을 뿌렸고, 주변 숲 일부 벌채로 방화 차단구역이 형성돼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현재 산속 사찰이나 정자, 문화유산 주변 삼림을 의무적으로 벌채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다. ‘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제42조, ‘자연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 제22·38조를 보면, 국가유산청장은 국가지정문화유산, 천연기념물 또는 명승의 보존·관리를 위하여 필요할 경우 긴급한 조치를 명할 수 있다고 정해놓았다. 하지만 벌목 조치에 대한 현상 변경은 각 행위에 따른 개별적 판단이 필요해 급박한 산불 상황에서 현실성이 없다.
사상 처음 산불재난 국가위기경보 심각 단계를 발령한 상황에서 국가유산청은 사후약방문 성격의 대응을 내놓았다. 지난달 26일부터 산불 재난상황 종료 때까지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긴급 보호행위가 필요한 경우 주변 수목 제거 또는 자연문화유산의 대피 등을 위하여 필요한 행위는 선조치 후 사후승인을 신청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산불이 국가지정보물과 지방지정유산을 포함해 30건 넘는 지역 문화유산들을 할퀴고 지나간 상황에서 한시적인 행정조치는 허망해 보인다. 당장 문화재보호법 등의 법제 규정을 손질해 산속 산사나 문화유산의 경우 반경 수㎞ 권역의 삼림을 벌채하고 수분이 많은 활엽수종을 인근에 식재하는 등 산불 차단선 대책이 나와야 한다.
지난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덮친 대형 산불이 코앞 1m까지 접근해왔지만 전혀 피해를 입지 않은 명문 미술관 게티뮤지엄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여년 전 설립 당시부터 방화 구역을 구획해 철저하게 차단하고, 아카시아 등 불연소 수종을 주위에 집중 식재하고, 자체 대형 수조저장고를 파서 긴급 산불 상황에서도 물길을 트고 지속적으로 살수하는 체계적인 대응책이 적중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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