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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훈현·이창호 완벽연기한 이병헌·유아인의 연기대결…‘승부’[영화프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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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

영화 ‘승부’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1990년대의 바둑은 어느 스포츠 종목보다 인기가 대단했다. 그 중심에는 전신(戰神·전쟁의 신) 조훈현(72)과 석불(石佛·돌 부처) 이창호(50)가 있었다. 둘의 대국은 당시 신문 1면과 TV 저녁 뉴스에서도 다룰 정도였다.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300회가 넘는 공식전을 벌이며 일생에 걸쳐 치열하고 처절한 승부를 펼쳤다.

26일 개봉하는 ‘승부’는 대한민국 바둑 전설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조훈현이 1989년 중국 응씨배에서 우승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귀국 후 카 퍼레이드를 할 정도로 국민 영웅이 된 그는 바둑 신동 이창호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집에 들여 키우는 ‘내제자’로 받아들인다. 한 지붕 아래 먹고 자며 생활한 스승과 제자는 수년 후 첫 사제 대결을 벌인다. 당연히 우승이 예상됐던 조훈현은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는 가운데 이창호에게 충격적으로 패한다.

인물을 내세운 영화이다 보니 배역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조훈현을 맡은 배우 이병헌(55)은 조훈현의 이대팔(2:8) 가르마와 시선 처리 등을 그대로 가져왔다. 각본을 쓰고 연출한 김형주 감독이 “시나리오 첫 페이지를 쓰자마자 이병헌이 적역이라고 생각했다”고 했을 정도다. 느슨하게 뜬 눈에 입꼬리를 아래로 내린 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는 유아인(39) 배우 역시 영락없는 이창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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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승부’의 한 장면.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영화의 백미는 첫 공식 대국 승부 이후 엇갈린 감정을 연기하는 두 배우의 연기 대결이다. 스승은 자신을 이긴 제자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하고, 제자는 정상에 올랐지만 기뻐할 수 없는 아이러니를 두 배우가 밀도 있게 그려낸다. 이병헌은 제자에게 패한 뒤 충격에 빠져 방황하면서도 마음을 추슬러야 하는 조훈현을, 유아인은 세월을 꾹꾹 눌러 담아 버틴 우직한 청년 이창호를 연기한다. 대형 화면으로 봤을 때야 두 배우의 진가를 톡톡히 느낄 수 있다.

바둑을 소재로 하지만, 규칙과 ‘사활’, ‘반집 승부’ 등 관련 용어를 풀어주기 때문에 바둑 규칙을 잘 몰라도 무난하게 볼 수 있다. 대국 장면은 컴퓨터그래픽(CG)을 적절히 활용해 경쾌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연출했다. 특히 조훈현과 이창호의 기풍(바둑 두는 스타일)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다. 화려하고 현란한 공격이 돋보이는 조훈현의 기풍, 두텁게 진형을 구축하고 상대를 깨부수는 이창호의 기풍을 역동적으로 연출했다.

2001년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35기 한국통신 M.com 018배 패왕전 본선 19국에서 승부를 벌이고 있는 이창호 9단(왼쪽)과 조훈현 9단.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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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 영화는 2021년 촬영을 모두 마친 뒤 2023년 넷플릭스에서 공개할 예정이었지만, 유아인의 마약 투약 사건으로 좌초 위기를 겪다 극장에서 빛을 보게 됐다. 더 이상 스승이 될 수 없음을 알게 된 조훈현이 이창호에게 “자신의 바둑을 찾아라”라는 말을 남기면서, 영화는 ‘승부는 남과의 싸움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주제를 드러낸다.

조훈현과 이창호는 실제 인물이지만, 영화 속 다른 바둑기사는 여러 인물을 조합했다. 예컨대 남기철(조우진) 9단은 스승의 빛에 밀려 그늘에 있던 이창호를 끌어올리고, 제자에 밀려 빛을 잃은 조훈현을 일으켜 세우는 중요한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서봉수 9단이 모델이 됐다. 조훈현이 이창호를 만난 시점은 한참 전이지만, 영화에선 조금 다르게 배치했다.

남편 조훈현과 남편을 이긴 제자 이창호를 한 차에 태우고 대국장으로 향하는 복잡한 심경의 아내 정미화를 연기한 문정희를 비롯해, 어린 이창호를 연기한 김강훈, 이창호·조훈현과 오랫동안 함께하며 둘을 이해하는 천승필·이용각 프로 기사를 연기한 고창석과 현봉식 배우의 맛깔나는 연기도 감상 포인트다. 115분, 12세 이상 관람가.

김기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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