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미시간대 이학박사…초대 국립관상대장으로 16년간 재직
1926년 미국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원철은 국내 첫 이학박사였다. 졸업 직후 모교인 연희전문 교수로 돌아온 그는 학교 옥상에 6인치 굴절망원경을 설치, 천체 관측에 나섰다. 이원철은 당시 국내 유일의 고급 천문학을 강의하는 교수였다./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 이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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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파인(巴人) 김동환이 창간한 월간잡지 ‘삼천리’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을 소개하면서 연희전문 수물과 교수인 이원철을 조명했다. 당시 서른셋 천문학자로 1926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조선인으로는 첫 과학(理學)박사를 취득한 엘리트였다. ‘신동’ ‘천재’로 이원철을 추켜세우던 기사는 급기야 그의 이름을 딴 ‘원철星’이란 별까지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수십년 내로 정예의 과학을 가지고도 수백의 세계 천문학도가 찾지 못하던 유명한 별 한 개를 역학(力學)의 힘을 통하여 발견하였음으로 천문학자들은 놀라기를 말지 않아서 그 별 이름을 씨(氏)의 이름을 따서 ‘원철’星(성)이라고 공칭한다고 합니다.’(삼천리 3, 1929, 11)
이원철은 1926년부터 연희전문 수물과 교수로 제자들을 가르쳤다. 1938년 경의 이 교수 사진./ 우남 이원철박사 60주기 추모기념식 자료 |
조선인 천문학자 이름을 딴 별이 있다는 소식은 일제 치하 짓눌린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할까지 했다. ‘원철성’을 발견했다는 보도는 오보였다. 이원철이 ‘독수리자리 에타별’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 별을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까지도 이원철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원철성’ 발견자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정보지만 이원철은 이 ‘오보’ 덕분에 유명세를 타면서 천문학을 비롯 과학 강연자로 활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원철은 1930년 12월 종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열린 통속대학 강좌에서 천문학을 강연했다. 감리교 청년단체인 경성정동엡웟청년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했다. 이원철은 일제시대 천문학을 대중에게 알리는 강연에 단골로 나섰다. 조선일보 1930년12월4일자 사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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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서양 수학교육 전문가 베커가 스승
1919년 연희전문을 졸업한 이원철은 1922년 베커 교수 주선으로 앨비언대를 거쳐 미시간대학으로 옮겨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26년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귀국, 모교 교수가 된 것이다. 그의 수업은 조선에서 거의 유일한 고등 수준의 천문학 강의였다고 한다.
1919년 연희전문 수물과를 졸업한 이원철의 졸업사진. 강사로 2년간 일하다 1922년 미국으로 유학갔다. /이원철 박사 60주기 추모기념식 자료 |
◇학교 옥상에 6인치 굴절망원경 설치
연희전문 수리연구회가 주최하고 조선일보 학예부가 후원한 통속과학 강연회에서도 이원철은 단골 연사였다.(통속과학 강연 성황, 조선일보 1936년11월29일)
1926년 연희전문 교수로 부임한 이원철은 워낙 수학 계산이 빨라 학생들로부터 '비행기선생'으로 불렸다. 단 것을 좋아해 '사탕버러지'란 별명까지 붙었다. 동아일보 1930년9월27일자. |
◇‘비행기 교수’ ‘사탕버러지’
이원철은 스타 과학자였다. 서른 넷 넘도록 독신인 그의 속내가 궁금했던 모양이다. 1930년 그를 취재한 기자가 독신인 이유를 묻자 ‘별 이유는 없다’고 답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32년 서른 여섯에 경성치과의전 병원에 근무하던 김화순과 결혼했다. 의사와 환자로 만나 부부의 연까지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사엔 젊은 시절 이원철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도 담고 있다. ‘선생이 어찌 수학을 속히 풀어버리는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한다. 학생들 사이에는 비행기선생이라 하고, 음식물로는 단 것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사탕버러지’라고도 한다고 하다.’(延專의 비행기, 이원철 박사, 동아일보 1930년9월27일)
순탄한 학자 생활을 이어가던 이원철은 1938년 9월 흥업구락부 사건에 연루돼 연희전문을 떠났다. 이승만의 국내 독립운동조직인 흥업구락부는 신흥우 억겸 등 YMCA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주의자들이 주도했는데, YMCA에서 활약한 이원철은 그해 5월 체포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4개월 후 사상전향서를 쓰고 풀려났지만, 연희전문에 사직서를 써야했고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국립 관상대 초대 대장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미 군정청 산하 관상대를 설립하고 1961년까지 16년간 대장을 맡았다. 현(現) 기상청 전신이다. 부대장은 연희전문 수물과 제자이자 교토제대 수학과 출신인 국채표가 맡았다. 이원철은 국채표의 미국 유학을 주선했고, 시카고대 기상학과에서 공부한 국채표는 이원철 뒤를 이어 제2대 관상대 대장으로 활약했다. 1947년 관상대 직원을 중심으로 조선기상학회(한국 기상학회 전신)를 창립,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원철은 1963년 4월 로마에서 열리는 국제기상학회 참석을 앞두고 갑작스레 별세했다. 천문기상학 개척자의 부음을 알린 조선일보 1963년 3월22일자 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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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재산 YMCA에 기부
그는 국내 기상학과 천문학 연구 인력을 키우고, 제도를 만든 개척자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1960년 학술원 회원이 됐다. 1961~1963년 연세대 재단 이사장을 지냈고, YMCA 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이원철은 갈월동 집과 남양주 금곡리 임야 3만6000평 등 전재산을 YMCA에 기부했다. 종로 서울 YMCA 회관 2층 ‘우남 이원철홀’은 그를 기념한 공간이다.
1963년 4월 로마에서 열리는 국제기상회의 참석을 준비하다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우리 나라의 기상천문학계를 개척한 선구자’(사라진 큰 별 故 이원철박사, 조선일보 1963년3월22일)가 타계하자 신문마다 고인을 기리는 부음기사를 내보냈다. 이원철은 2017년 정부가 선정한 첫번째 과학기술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다.
‘원철’星까지 발견한 세계적 천문학자 이원철박사, 삼천리 3, 1929년3월
이상구, 한국근대수학인물사 3, 호라이즌, 고등과학원, 2020.1.31
김근배, 이은경, 선유정 편저, 대한민국 과학자의 탄생, 세로,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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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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