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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고래사냥’ 담은 반구대 암각화 최초 탁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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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고래사냥’ 담은 반구대 암각화 최초 탁본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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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2월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확인한 직후 동국대 조사단이 바로 떠서 옮긴 암각화의 탁본. 25일부터 시작하는 동국대박물관의 탁본 특별전 ‘보묵천향’에서 처음 일반 관객 앞에 공개된다. 동국대박물관 제공

1971년 12월 울주 반구대 암각화를 확인한 직후 동국대 조사단이 바로 떠서 옮긴 암각화의 탁본. 25일부터 시작하는 동국대박물관의 탁본 특별전 ‘보묵천향’에서 처음 일반 관객 앞에 공개된다. 동국대박물관 제공


1971년은 한국 문화유산 역사에서 가장 짜릿한 발견의 해였다. 7월7일 충남 공주 송산리에서 백제 무령왕 벽돌 고분이 사상 처음 도굴되지 않은 채 나왔다. 다섯달 뒤인 12월25일 성탄절 아침 경남 울주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 암벽에서 5000~7000년 전 선사인들이 고래잡이 장면을 새긴 거대 암각화가 확인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암각화 발견의 주역은 당시 30대 초반의 역사학자들. 훗날 문헌사·고고사·미술사학계 대가들이 된 김정배·이융조·문명대였다. 한해 전 12월 신라 화랑들이 새긴 울주 천전리 각석을 확인·조사한 문명대가 동료 김정배·이융조에게 천전리 답사를 가자고 권유해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날 셋은 동반 답사를 했다. 토론 자리에 합석한 대곡리 주민 최경환씨가 천전리 아래쪽에 더 큰 그림이 있는 걸 발견했다고 귀띔하자 흥분한 셋은 성탄절 아침 배를 타고 대곡천으로 갔다. 물에 일부 잠긴 채 아른거리는 석벽의 고래잡이와 들짐승 사냥 장면 그림들을 확인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날 발견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고래잡이 광경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반구대 암각화의 ‘명작의 연대기’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는 1965년 들어선 댐 때문에 침수로 훼손이 심화되면서 벌어진 암각화 보존 논란의 서막이기도 했다.



청년 학자들의 발견 직후 동국대박물관 암각화 조사단이 먹으로 조심스럽게 떠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최초 탁본이 처음 대중 앞에 선보인다. 동국대박물관(관장 임영애)은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한 희귀 탁본 소장품들을 소개하는 특별전 ‘보묵천향(寶墨天香)―보배로운 먹, 하늘의 향기’를 오는 25일 시작한다. 1963년 박물관이 문 연 이래 60여년간 입수·소장해온 탁본들 가운데 대표작을 추려 내보이는 자리다.



전시를 상징하는 유물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의 최초 탁본은 세 청년 학자가 확인하고 석달 뒤인 1972년 3월 동국대박물관 조사단이 만들었다. 반구대 절벽 아래 강물과 맞닿은 면에서 고래를 사냥하는 대형 암각화를 발견했을 때까지 파악된 도상들에 한해 먹을 묻히고 세부 윤곽을 가로 5m, 세로 2m의 화선지에 떠냈다. 문명대 교수가 책임을 맡은 조사단의 첫 탁본 작업은 암각화 석벽의 침수가 되풀이되어 훼손이 심화한 지금보다 도상 상태가 월등히 좋다. 그림의 원형 분석에 큰 도움을 주는 사료라 할 수 있다. 반전된 흔적 선이 명확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과 예술적 감각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사료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5000~7000년 전)에 걸쳐 수렵과 어로를 하는 선사인들이 새긴 것으로 추정돼 국내 암각화 유적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공인됐다. 지난해 국가유산청은 이런 역사적 가치를 고려해 세계유산 우선 등재 대상으로 반구대 암각화를 선정한 바 있다.



1971년 12월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주민 제보로 처음 확인하고 조사 중인 당시 연구자들. 왼쪽부터 김정배, 이융조, 문명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의 2021년 1월 뉴스레터에 실린 김정배 고려대 명예교수 제공 사진이다.

1971년 12월 울주 대곡리 암각화를 주민 제보로 처음 확인하고 조사 중인 당시 연구자들. 왼쪽부터 김정배, 이융조, 문명대.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의 2021년 1월 뉴스레터에 실린 김정배 고려대 명예교수 제공 사진이다.


전시는 네 갈래로 나뉜다. 들머리의 ‘두드림으로 기록한 역사’에서는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바위에 새긴 고대 종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석수동 마애종’(경기도 유형문화유산) 탁본을 선보인다. 역사를 기록하는 의미를 색다른 시각으로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뒤이어 1부 ‘불심, 탁본으로 피어나다’에선 종·광배·탑·비석에 새겨진 조각과 문양 등의 탁본을 통해 한국 불교미술이 지닌 독특한 미감을 살펴본다. 2부 ‘하늘과 땅의 질서를 새기다’에선 고승의 업적을 기리는 비문, 천문도, 왕릉 비석의 탁본 등을 전시한다. 3부 ‘두드림, 영원히 기억되다’에선 탁본이 지니는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북한 문화유산과 사라진 유물들의 탁본을 선보인다. 국외 소장처에 있는 통일신라 범종 탁본과 대표 수장품인 ‘보협인석탑’의 탁본, 고려시대의 불비와 금석문예술을 대표하는 ‘개성 현화사비’(1021)의 탁본, 조선시대 유명 종인 삼막산 동종(1625)의 탁본 등 박물관만이 소장한 명품들이 줄줄이 나온다.



전시 제목 ‘보묵천향’은 조선 말기 학자 유중교(1832-1893)가 자신의 문집 ‘성재집’ 38권에 ‘가하산필’(柯下散筆)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먹이 아직 바래지 않았고, 묵향은 여전히 새롭다’(寶墨未沫. 天香猶新)는 구절을 줄여서 따온 것이다. 박물관 쪽은 “탁본을 중심으로 우리 박물관의 오랜 학술 연구 역사를 되짚어보고, 소장한 희귀 탁본들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훌륭한 유산이 오래도록 전해지길 바라며 담아낸 탁본을 통해,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먹빛 속 새 향기를 느껴보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5월9일까지.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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