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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7 (금)

기습 침공했다 '철의 여인'에 맞은 철퇴…4년 뒤 찾아온 '운명의 장난' [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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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스포츠+] 전쟁 치른 아르헨티나-잉글랜드의 축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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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스포츠사를 수놓았던 명승부와 사건, 인물, 교훈까지 별의별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별별스포츠+', 역사와 정치마저 아우르는 맥락 있는 스포츠 이야기까지 보실 수 있습니다.


'축구는 전쟁 이상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 인기 스포츠인 축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 많은 축구 대회 가운데 최고봉은 역시 FIFA 월드컵입니다. 4년마다 슈퍼스타들이 조국의 명예를 걸고 일전을 벌이는 월드컵은 언제나 지구촌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리며 숱한 명승부를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월드컵에서 만난 두 팀이 실제로 전쟁을 치렀던 나라였다면 어땠을까요? 그야말로 '축구가 전쟁 이상이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불꽃 튀었던 세기의 대결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벌어졌습니다.

포클랜드 놓고 격돌한 영국과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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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제도는 남대서양에 있는 200여 개의 섬으로 1833년부터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의 앞마당에 위치해 있어 아르헨티나는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가 아니라 '말비나스'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를 기습적으로 침공했습니다. 당시 포클랜드 제도에는 고작 100여 명의 영국 해병대원들만이 주둔하고 있어서 아르헨티나의 대대적인 공격에 얼마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습니다.

아르헨티나가 침공한 데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습니다. 1976년 아르헨티나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로 이사벨 페론 민간 정권이 전복되고 군사 정권이 세워졌습니다. 이후 독재와 탄압이 자행됐고, 무리한 외채로 인해 극심한 경제난까지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민심이 매우 안 좋았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1982년 당시 레오폴도 갈티에리 대통령은 국민들의 불만을 외부의 적으로 돌리려는 전략을 세웠습니다.

그 대상은 아르헨티나 군부의 판단으로는 한물간 나라로 여겨졌던 '영국'. 당시 '영국병'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영국도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은 무력으로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하면, 영국이 국력 소모를 감수하고 멀리 떨어진 포클랜드를 수복하러 오기보다는 협상을 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설령 영국이 반격을 하더라도, 영국에서 너무나도 먼 포클랜드 제도가 전쟁의 무대이기에 보급의 문제 때문에 실질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군사력은 아르헨티나가 앞선다고 판단했습니다.

'철의 여인'에 철퇴 맞은 아르헨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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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르헨티나의 판단은 오래지 않아 오판으로 드러났습니다. 당시 영국 총리는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거릿 대처. 대처 총리는 일부 각료들의 반대와 최대 우방이었던 미국 레이건 대통령의 만류에도 전쟁을 통한 포클랜드의 탈환을 명령했습니다. 3만 명에 이르는 육해공 전력을 지구 반대편 포클랜드 제도로 보냈습니다. 영국 본토에서 포클랜드까지 거리가 무려 1만 3,000km. 75일에 걸친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는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당시 전쟁에서 영국군 255명과 아르헨티나군 649명이 전사한 가운데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했습니다.

이후 양국 지도자의 희비도 엇갈렸습니다. 대처 총리는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반면 갈티에리 대통령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6월 17일 대통령직에서 사임했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듬해인 1983년 군사독재 정권이 종식되고 민주적인 선거를 통한 문민 정부가 수립됐고 갈티에리 대통령은 문민 정부 수립 이후 집권 당시 인권 탄압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수감됐습니다.

패전 충격 속 아르헨티나의 졸전



1982년 스페인 월드컵 개막전은 아르헨티나와 벨기에 경기로 치러졌습니다. 아르헨티나는 직전 대회인 1978년 월드컵 우승팀 자격으로 개막전에 나섰는데 경기가 열린 날은 6월 13일. 공교롭게도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가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한 날(6월 14일) 하루 전이었습니다.

대회 출전 직전까지 군사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 속에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국이 포클랜드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스페인에 와서 전해 들은 포클랜드 전쟁 참상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특히 개막전 하루 전에 1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며 아르헨티나군이 영국에 큰 패배를 당했다는 소식에 침울한 분위기에 빠졌습니다. 훗날 마라도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밤새 통곡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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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스페인 대회는 아르헨티나의 축구 영웅 디에고 마라도나가 처음 출전했던 월드컵. 당시 22살 어린 나이로 아르헨티나 축구의 미래로 불리며 등번호 10번과 주전 자리를 꿰찼습니다. 직전 대회 우승 주역이자 득점왕(6골) 마리오 켐페스도 건재했고 수비의 핵이자 주장 다니엘 파사렐라도 4년 전에 이어 다시 출전했습니다. 하지만 개막전에서 벨기에에게 1대 0으로 패배하며 일격을 당했습니다. 이후 헝가리와 엘살바도르를 연파하고 2승 1패 조 2위로 조별리그를 통과했지만 이후 12강 조별리그에서 무기력한 경기 끝에 2패로 탈락했습니다.

이탈리아, 브라질과 함께 이른바 '죽음의 조'에 들어갔는데 이탈리아에게 2대 1 패배, 브라질에는 3대 1로 졌습니다. 특히 브라질전에서 마라도나는 후반 40분 상대 선수(바티스타)의 복부를 걷어차는 거친 반칙으로 다이렉트 퇴장(레드카드)을 당하며 쓸쓸히 대회를 마감했습니다. 이렇게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12강 조별리그에서 탈락하며 짐을 쌌습니다.

전쟁 4년 뒤 다시 만난 아르헨티나-잉글랜드



포클랜드 전쟁 4년 뒤인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마라도나가 26살로 절정의 기량을 보일 때로 그는 주장 완장을 차고 팀을 이끌었습니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대한민국, 이탈리아, 불가리아와 A조에 속했는데 첫 경기에서 우리나라와 대결했습니다. 32년 만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한국은 마라도나의 3어시스트 활약 속에 3대 1로 졌습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박창선 선수가 역사적인 월드컵 본선 1호 골을 기록하며 패전의 아쉬움을 다소나마 달랬습니다. 아르헨티나는 2차전에서 '디펜딩 챔피언' 이탈리아와 1대 1 무승부, 3차전에서 불가리아에 2대 0으로 승리하며 2승 1무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습니다.

반면 잉글랜드는 극적으로 조별리그를 통과했습니다. 잉글랜드는 포르투갈, 폴란드, 모로코와 F조에 속했는데 첫 경기에서 포르투갈에 1대 0으로 일격을 당했고 2차전에서는 아프리카의 복병 모로코와 무기력한 경기 끝에 0대 0 무승부에 그쳤습니다. 1무 1패로 탈락 위기에 빠진 데다 마지막 3차전 상대는 직전 대회 3위를 차지했던 강호 폴란드여서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그런데 간판 스트라이커 게리 리네커가 전반에만 3골을 몰아치며 예상외로 3대 0 완승을 거두며 1승 1무 1패 조 2위로 16강에 올랐습니다.

16강 토너먼트에서 아르헨티나가 우루과이를 1대 0으로 꺾고 8강에 선착했고 이틀 뒤 잉글랜드는 리네커의 2골 활약 속에 파라과이를 3대 0으로 누르며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아르헨티나의 8강 상대로 결정됐습니다.

포클랜드 전쟁의 재판, 세계 언론의 뜨거운 관심



1986년 이 당시만 해도 포클랜드 전쟁에 대한 양측의 기억이 아직 생생할 때였습니다. 4년 전 전쟁을 치러 양측에서 900여 명이 희생됐던 두 나라가 월드컵 8강이라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것입니다. 게다가 축구는 두 나라 모두의 최고 인기 종목. 전 세계 주요 언론은 '포클랜드 전쟁의 재판(再版)'이라는 제목으로 두 나라 간의 경기를 묘사할 정도로 관심이 높았고 두 나라 국민 사이의 감정도 당연히 안 좋았습니다.

당시 승부도 예측 불허였습니다. 아르헨티나는 마라도나가 절정의 기량과 함께 슈퍼스타로서 경기 흐름을 좌우하는 지배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잉글랜드도 두 경기 연속 강호들을 상대로 3대 0 완승을 거두며 한껏 상승세를 타고 있었습니다. 특히 스트라이커 리네커가 2경기에서 5골을 몰아치며 절정의 골 감각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영국 언론에서는 잉글랜드가 자국에서 열린 1966년 월드컵 우승 이후 20년 만에 가장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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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언론들은 '축구 전쟁', '축구 이상의 경기'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보비 롭슨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에게도 관련 질문이 나왔습니다. "이 경기의 정치적인 의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이에 대해 롭슨 감독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이런 질문으로 시간 낭비하지 마라. 나한테 정치, 외교에 관한 질문은 하지 마라. 우리는 축구를 하기 위해 여기에 있고, 이 두 가지 이슈를 혼동하지 마라.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고 일갈했습니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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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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