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
집착·통제 ‘소유의 사랑’이 보이는 치부
“난 밝은 사람 아냐…위로의 이야기 되길”
넷플릭스 시리즈 ‘트렁크’에서 한정원 역으로 분한 배우 공유를 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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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184㎝의 큰 키,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체격. 신장도 체중도 두 배쯤 커보이는 남자는 움켜쥐면 으스러질듯 앙상하게 말라버린 여자를 통해 안식을 얻는다. 여자를 만나기 전 남자의 삶은 황폐했다. 비루먹은 강아지처럼 구부정한 등으로, 생의 의지라곤 찾을 수 없는 눈동자로 세상에 나왔다. 삶의 순간마다 ‘인연의 고리’로 엮였던 두 남녀는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구원자였다.
“유년시절 (아버지의 어머니에 대한) 가정폭력을 경험한 정원이는 그때 성장을 멈췄을 거다. 온전한 사랑을 본 적이 없어 화석처럼 굳어버린 무감각한 인물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서 계속해서 말라간 사람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공유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에서 연기한 한정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정원은 어쩌면 공유의 역대 필모그라피 중 가장 유약한 인물일 지도 모른다.
정원의 삶은 끔찍한 폭력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가득 차있다. 어린 정원의 시간은 처참했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속에 숨겨진 CCTV는 집안 곳곳을 감시했고, 어머니는 날마다 죽음을 기도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 목을 매달 밧줄을 손수 만들어 쥐어준 채, 맨발로 집을 뛰쳐나온다. 빗속을 내달리던 그 날, 우산을 씌워주는 어린 ‘서연’(정윤하 분)을 만난다. 정원의 참혹한 현실을 가려줄 ‘환각제’ 같은 사람. ‘뒤틀린 사랑’을 했던 정원의 첫 구원자는 그를 옭아매기 위해 기간제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정원의 안식처인 노인지(서현진 분)를 만나게 한 장본인이 바로 서연이다. 정원이 1년동안 가짜 결혼생활을 잘 수행하면 다시 자신 곁을 내주겠다는 채찍과 당근을 준 것이다.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굴레에 갇혀 말라가는 남자 ‘한정원’은 공유의 말에 따르면 “수동형의 멍청한 찌질이”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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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는 이 드라마의 본질은 ‘사랑과 관계’라고 했다. 정원을 향한 서연의 광적인 집착과 통제, 양성애자 도하의 구원자가 되리라 생각한 인지, 서연을 끊어내지 못하다 인지에게 이끌리는 정원은 모두 미숙한 관계 속에서 얽매이고 상처받는다.
그는 “사랑에 대한 나의 지향점을 이 작품이 건드렸다. 전 ‘소유의 사랑’을 지양하고, 집착이나 통제,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없는 성숙한 사랑을 지향한다”며 “소유의 사랑을 선택한 인물들이 보여주는 치부같은 것들이 이 드라마에서 보여진다”고 했다.
“서연 뿐만 아니라 인지 역시 (양성애자인 남자)서도하를 소유하고 싶어했다. 그를 기어코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끌고 들어가고 싶어했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사건을 겪고 그녀 스스로 많은 성찰을 했을 것이고, 그 죄책감으로 자신을 자학하는 중이다.”
서연이 만든 세계에 갇혔던 정원은 인지를 만나 현실로 돌아온다. 약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잠이 들면 물에 잠기거나 샹들리에 조명이 떨어지는 악몽을 꾸던 그는 인지와의 ‘기간제 결혼’ 이후 편안한 밤을 맞는다. 잠을 재워주는 존재만큼 소중한 사람이 있을까. ‘걱정마요. 해일이 여기까지는 못와요.’ 서연만을 바라보는 충성심 강한 강아지인 정원이 어느새 인지를 더 우선순위에 올려두는 지점은 명확하다.
공유는 “정원은 ‘가구 하나를 새로 들이는 것도 불편하다’고 하는 사람이다. 모든 것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인물”이라며 “그런데 사람이라는게 본능적으로 끌린다는 감정이 있다. 인지의 존재가 나를 위로하는 것 같고, 그걸 알아가면서 마음이 어느새 확 열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원을 “수동형의 멍청한 찌질이”로 봤다.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서연과 인지보다도 한 발 아래에 있는 가여운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기꺼이 정원이 되기로 한 것은 “우울하더라도 그 이면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는 갈망 때문이다. 그는 “나이를 먹으며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는 중인데, 사실 전 밝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며 “어떤 이면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좀 더 위로나 치유의 작품이 될 수 있을 거 같았다”고 했다.
“올해 초 한 예능에서 ‘요즘 연기하는게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 때가 한창 트렁크를 찍는 중이었다. 우울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 마음은 편했나보다. 변태적이라고 생각할 수는 있는데, 저는 슬플 때 더 슬픈 걸 보는 사람이다. 극 중 인지가 공포영화를 보면서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다는 데서 안도한다고 말한 것처럼, 저는 기쁘고 행복한 이야기로 기분이 좋아지지 않고 외려 아주 아주 슬픈 영화에서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있다.”
배우 공유가 “슬플 때 기쁜 이야기보다 슬픈 이야기에서 더 큰 위로를 얻는다”고 말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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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원을 연기하며 “스스로 땅굴을 파고 들어갔을 때를 많이 곱씹었다”며 “이젠 연기적으로 제 실제 삶의 고통을 꺼내 표현할 정도의 굳은살이 생겼다”고 돌아봤다. 극 후반부 열심히 콩나물을 무치다 불현듯 인지하고 내뱉는 “외롭다”는 정원의 한 마디는 쓰게 다가온다.
이런 그가 좋아하는 드라마는 심오하고 우울한 정서가 내재된 ‘나의 해방일지’가 이름을 올린다. 공유는 “박해영 작가님 작품을 좋아한다. (서) 현진 씨가 나온 ‘또 오해영’도 좋아하지만 진짜 제 취향은 ‘해방일지’ 쪽”이라고 말했다.
‘해방일지’처럼 ‘트렁크’도 대사가 일상적이지 않다. 주어와 서술어를 도치하는 화법이나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법한 것을 발화하는 순간 분위기는 일순 어색해질 수 있다.
공유는 “연기하면서 재밌었다. 보통의 대사체보다 확실히 센 워딩들이 많았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 한번쯤은 뱉고 싶은 말들이 있지 않나. 하지만 그렇게 하면 패륜이 될 수 있어 꾹 참는 (말들). 그런데 허구의 프레임 안에서 이렇게 표현해보는 것은 재밌다고 생각했다”며 “누군가에겐 불편할 수 있고 진입장벽이 높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개인적으론 해볼만한 시도였다고 본다”고 밝혔다.
참. ‘도깨비’를 비롯해 공유의 작품을 좋아하는 시청자와 그의 팬들에게 비보가 하나 있다.
“햄버거집에서 인지와 정원이 꽁냥대는 장면 찍을 때 오글거려서 혼났다. 사실 그런 말랑한 신이 몇 안되었지만 저희 둘 다 그게 무척 힘들었다.(웃음) 예전에는 이런 걸 어떻게 했더라 싶었다. 이제는 좀 잘 안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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