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성일(44)은 좀처럼 휩쓸리는 법이 없다. 넷플릭스 '더 글로리'로 신드롬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차기작으로 연극을 선택하고 홀연히 무대로 떠났다. "자신을 채우고 비우는 시간"이라며 거센 인기의 물살에도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넷플릭스 '전, 란' 이후에도 그랬다. 공개 후 국내외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지만 여전히 고요하고 묵묵하게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주경제는 넷플릭스 영화 '전, 란'의 배우 정성일과 만나 인터뷰를 나누었다. 영화 합류 과정부터 그가 맡은 '겐신' 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지금까지 (영화 '전, 란'을) 6번 봤어요. 재미도 있고 배우들 (라인업도) 좋고 영상미도 참 좋고요. 오랜 시간 (넷플릭스 시청) 순위권에 올라갈 수 있었던 건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겠죠? 여러 조건을 잘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서 참 기쁘고요."
영화 '전, 란'은 왜란으로 혼란에 빠진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강동원 분)이 적으로 재회하게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심야의 FM' '걸스카우트'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김상만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올드보이' '아가씨' '헤어질 결심'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시나리오를 맡아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다.
"'전, 란' 시나리오를 읽고 '우와' 했어요. 시나리오만 봐도 제가 해야 할 역할이 눈에 그려지더라고요. 시나리오가 소설처럼 읽히더라고요. 한 번에 술술 넘어갔고 읽을수록 뒤 내용이 궁금해졌어요. 강동원, 박정민이 이미 캐스팅이 되어있는 상황이어서 이들이 어떻게 연기할지도 정말 궁금했고요. 기대가 컸죠."
정성일은 박찬욱 감독이 쓴 대본을 읽고 내내 감탄했다며 머릿속에서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았다고 설명했다.
"'전, 란'은 지문만 읽어도 명확하게 그림이 그려지는 작품이었어요. 읽으면서 상상하기도 쉽고 (캐릭터나 상황도) 구체화하더라고요. 당시 감독님이 미국에서 '동조자' 촬영 중이었는데도 계속해서 시나리오를 수정해 보내주셨고 '겐신'도 더 구체화 될 수 있었어요. 그 과정에서 '겐신'이 죽는 장면도 수정됐죠."
정성일이 연기한 '겐신'은 조선 땅을 침략한 일본군의 선봉장이다. 사무라이 갑주를 입고, 도깨비 탈을 쓴 채로 마치 사냥터를 누비듯 전쟁터를 누비는 인물. 의병단이 된 천영과 마주친 뒤 그와 끝까지 대결하고 싶어 한다.
"'겐신'은 무사도(武士道)를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무도(武道)가 변화하게 된 거죠. 조선을 침략하여 약탈을 반복하며 그가 가진 '무(武)'가 '무(無)'가 되어 사라지는 게 (캐릭터의)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던 중 천영을 만나 오랜만에 무도를 느끼게 된 거죠. 짧은 시퀀스 안에서도 그런 점들을 표현해 보고 싶었어요."
정성일은 치열하게 일본어 공부를 하며 겐신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히라가나부터 차근차근 배웠고 일본 배우에게 억양이나 감정 표현 등을 배우며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일본어 선배님께서 영화 '아가씨'를 자문해 주셨던 교수님이시더라고요. 제작사에서 소개해 주셨고 그 분께 일본어를 배우게 됐어요. 그냥 일본어도 아니고 고어다 보니 어려움이 있더라고요. 그런 점들을 유의하며 익혔어요. 좋았던 건 한국어에 능통한 일본인 배우가 현장에 계셨다는 점이에요. 일본어로 연기하다 보면 억양 등에 관해 잘 알아야 하는데 제가 (선생님께) '이런 감정을 보여주고 싶은데 대사톤을 어떻게 읽으면 좋겠느냐'고 대화를 나누며 장면을 만들었어요. 아무래도 플랫폼이 넷플릭스다 보니 '일본에서도 볼 텐데' 싶어져서요. 몰입을 깨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연기하고 싶었어요."
'겐신'은 쌍검을 다루는 무사다. 정성일은 액션팀의 도움으로 무사히 이도류를 익히고 액션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실 (이도류가) 대사 연습만큼 힘들지는 않았어요. 영화 '쌍화점'을 찍을 당시 혹독하게 훈련을 했어서 어느 정도 몸에 익어있더라고요. 또 액션팀이 액션 디자인을 잘 짜주어서 멋지게 나온 것 같아요. 촬영도 재밌게 했어요. 천영 역을 맡은 강동원 배우가 잘 이끌어주어서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었어요."
정성일은 대부분 천영을 연기한 강동원과 호흡을 맞추었다. 그는 강동원과의 액션신을 언급하며 "최고와 최고가 만난다는 느낌"을 보여줘야 했다고 설명했다.
"'겐신'은 일본 최고의 무사고, '천영'은 조선 최고의 천재로 어떤 검술을 봐도 다 따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어요. 검술 액션도 '최고와 최고가 만난다는 느낌'을 내야 해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했습니다. 상대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줘야했어요. 연기적으로는 천영을 두고 '너라는 '무'는 내 발 아래'라고 생각하는 자만심이 느껴지도록 했습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성일은 자신만의 호흡법을 가진 배우다. 그는 '더 글로리'의 신드롬 적인 인기를 뒤로 하고 무대로 돌아가 관객들을 만났다. "욕심이 나거나 조급해지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당연한 수순이었다"며 비우고 채우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고 말했다.
"'더 글로리'가 끝나니 그와 유사한 캐릭터들이 들어오더라고요. 워낙 '하도영'이 사랑받은 캐릭터니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저는 같은 걸 반복해서 (연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무대에 오르고 마음을 비우며 연기 공부를 했어요. 그러다가 찾아온 게 '전, 란'이고요. 누군가는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고 하지만 잘 비우고 채워야 새로운 걸 도전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정성일은 배우로서, 인간으로서 채우고 비우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공연은 연습 기간이 있잖아요. 한 작품을 두고 준비하는 과정을 거치며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어요. 그런데 영화, 드라마의 경우는 매일 감독님과 만나는 게 아니니까 가끔 놓치고 가는 것들이 생겨요. 촬영장에서 놓친 게 집에서 떠오를 때면 '아, 왜 잊고 있었지'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그런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다시 준비하고, 작업하며 상기하러 (무대로) 돌아가는 거예요. 무대에 서고 매일 부딪치며 '이런 접근 법도 있구나' 하고 생각의 폭이 넓어져요. 그렇게 배워가는 거죠."
정성일이 채우고, 비우며 만든 결과물은 내년 대거 공개된다. 디즈니+ ''트리거'부터 '메이드 인 코리아' 등 다양한 작품으로 대중과 만난다.
"한 해 농사를 지었던 작품들이 쭉 나올 예정이에요. 작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는데. 크고 작은 역할을 통해 저의 다양성을 봐주신다면 좋겠어요. 그게 가장 큰 수확이지 않을까요?"
아주경제=최송희 기자 alfie312@aju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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