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문 첫 네컷 연재 만화
100주년 ‘멍텅구리’ 전편 공개
'멍텅구리' 게재를 알리는 조선일보 1924년 10월12일자 사고. 만화란 말이 익숙지 않아 '그림 이야기'로 소개했다. |
‘여보게, 총독부에서 담배장사를 하는 까닭에 저희 담배보다 나은 칼표에는 샘이 나서 조선 문턱에도 들이지 않는다네 그려.’
기생 옥매에게 빠진 ‘바람둥이’ 최멍텅은 옥매가 찾는 양담배 ‘칼표’를 구하기 위해 중국행을 불사한다. 포장지에 칼을 든 해적이 그려져 ‘칼표’로 알려진 영국산(産) 담배다. 곡절 끝에 담배 꾸러미를 들고 경성역에 내린 최멍텅은 밀수 혐의로 순사에게 붙들려 경을 친다. 총독부는 세수(稅收) 확보를 위해 1921년 연초전매령을 공포하고 담배전매제를 실시했다. 조선일보 1924년 11월 10~16일 자에 실린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헛물켜기’는 총독부 통치에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어깃장을 놓는다.
김동성이 기획하고 노수현이 그린 1924년 10월 13일자 네컷 만화 ‘멍텅구리 헛물켜기’ 첫회. 연재 초반 실없는 농담과 행동으로 가벼운 오락만화 인상을 줬다. 하지만 회를 거듭하면서 총독부의 강압 통치를 은근슬쩍 비판하는 내용이 자주 나온다. |
하루 아침에 좌측통행을 강제한 총독부 조치를 비꼰 1925년 3월11일자 '멍텅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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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4년 10월 13일 국내 신문 최초의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가 탄생했다. 독립운동가 신석우가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며 야심차게 내놓은 ‘혁신 조선일보’ 기획이다.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인 키다리 최멍텅과 그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당초 기생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오락만화’ 정도로 알려졌으나 총독부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비판하거나 서양 문물을 소개하는 시사만화 성격도 갖췄다. ‘한국 만화사의 기념비적 작품’이란 평가를 받은 이유다. 만화가 인기를 누리면서 ‘멍텅구리’란 말이 유행어로 떠올랐고 1926년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멍텅구리’ 영화가 만들어질 정도였다.
멍텅구리는 중단 6년만인 1933년 2월 다시 조선일보에 등장할 만큼 인기 코너였다. 조선일보 1933년 2월 23일자 사고 |
◇한국화 대가인 노수현, 이상범이 그려
전봉관 카이스트 교수 연구팀은 최근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빛바랜 신문 뭉치 속에 묻힌 네컷만화를 추출, 총 744회의 ‘멍텅구리’ 만화를 밝혀냈다. ‘멍텅구리’는 1924년 10월 13일 시작, 1927년 8월 20일까지 연재됐고, 1933년 2월 26일 재등장, 그해 8월 2일까지 연재했다. ‘헛물켜기’ ‘연애생활’ ‘자작자급’ ‘가정생활’ ‘세계일주’ ‘꺼떡대기’ ‘가난사리(살이)’ ‘사회사업’ ‘학창생활’ ‘또나왔소’ ‘모던 생활’ ‘기자생활’ 등 시리즈 12편으로 이뤄졌다.
미국 유학파 언론인 김동성(발행인)이 기획하고, 당시 신문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상협(편집고문)과 민세 안재홍(주필)이 스토리 구성을 맡았다.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의 양대 제자인 심산 노수현과 청전 이상범이 만화를 그렸다. 전봉관 교수는 “최초의 분업 시스템에 의한 공동 창작으로 시대를 반영하는 지표로서의 가치가 높다”고 평가한다. 노수현과 이상범은 한국화를 정통으로 배운 예술인들이었다. 노수현은 광복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내며 후학을 길렀고, 이상범 역시 당대를 대표하는 최고 작가로 떠올랐다.
심산 노수현은 심전 안중식의 직계 제자로 산수화에 뛰어난 정통 화단 엘리트였다. 심산은 1924년 10월 '혁신 조선일보'의 대표적 기획 '멍텅구리'를 맡았다. 1930년대 언론계를 떠난 심산의 서른여덟살 때 모습./ '심산 노수현 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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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만화로 알려졌으나 실은…
‘멍텅구리’는 연재 초반 주인공 최멍텅과 윤바람이 실없는 농담이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일삼는 ‘바보 개그’가 자주 나온다. 하지만 미술사 연구자 정희정은 ‘멍텅구리’가 총독부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강하게 비판했다고 지적한다. ‘치안유지법’ 비판이 대표적이다. 최멍텅이 사기로 목돈 버는 꿈 얘기를 하자 윤바람이 손사래친다. ‘나쁜 마음만 먹어도 10년 징역’(1925년 5월 17일 자)이라며 치안유지법을 대놓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이 관동대지진 이후의 혼란을 막는다며 1925년 5월 시행했다. 공산주의 단속을 내세웠지만 독립운동 탄압에 이용된 악법이었다.
‘멍텅구리’에는 순사가 자주 등장한다. 주인공을 때리거나 파출소에 가두고, 군중과 만세 소리에 놀라 해산을 명령하거나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한다. 식민지 정부의 폭력을 상징하는 도구인 셈이다. 경찰이 공중위생을 내세워 민물게장 파는 것까지 간섭하고 ‘좌측통행’ 을 강제하는 억압적 조치를 은근히 꼬집는다. 미두(米豆, 쌀· 콩 등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선물 거래) 투기 광풍과 이중과세(過歲, 양력설·음력설을 두 번 쇠는 것) 같은 부조리한 사회 현상도 폭로한다. 1920~30년대 사회 현실과 당대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엿볼 수 있다.
전봉관 교수는 ‘똑따다’(예쁘다) ‘양(洋)떡’(빵) 같은 100년 전 용어를 현대어로 풀고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배경 설명을 달았다. 본지는 11일 조선닷컴에 네컷만화 ‘멍텅구리’ 전편(744편)을 공개한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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