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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천’은 주연 배우 김민희씨가 올해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최우수연기상을 받아서 많이들 알고 계실 듯 하네요. 영화 얘기하기 전에 에피소드 하나. 김민희씨 수상 직후에 제가 제작사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사적인 얘기가 불편하면 직접적으로 묻지 않겠다, 이번 수상의 의미 등 배우 김민희가 걸어온 길에 대해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자리로 준비하고 싶다’ 등등. 솔직한 취지를 전했습니다.
답은 이튿날 왔습니다. 통화한 제작사 담당자분의 워딩. “감독님께서 ‘국내 인터뷰를 원칙적으로 하지 않아서 응할 수 없다, 죄송하다고 전달해달라’고 하셨어요.” 순간 묻고 싶은 말이 여럿 떠올랐지만 정중히 인사만 하고 끊었습니다. 어차피 그 분이 답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때 제 머리 위 말풍선을 여기에 옮기면 이렇습니다. “아니, 김민희한테 물었는데 왜 홍상수가 답을?” 미취학 아동도 아니고, 미성년자도 아니고, 성년후견인이 필요한 심신상실 금치산자도 아니지 않습니까. 예술적 동지라서? 아니죠, 예술가면 더더욱 개별성 독립성 주체성이 중요하죠. 그래서 더 실망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거절이야 당연히 할 수 있는 거고, 예상했던 바. 하지만 예술가로서 배우로서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는데 같이 작업한 감독이 답변을 한다라. 그 감독과 관계가 아무리 특수해도 적절한 대응은 아니지 않나 합니다. 제가 만약 김민희를 사랑하는 남자였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 같네요. 사랑했을수록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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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천’으로 돌아와서. ‘홍상수가 이번엔 어떤 영화를 만든거야?’ 궁금하실 분을 위해 대략 설명드리겠습니다. 홍상수 영화의 4대 요소, 남자 여자 술 침대. 이번에도 나옵니다. 그래도 예전 같진 않아요. 최근작의 특징인데, 홍 감독이 침대에 대해서 예전만큼 끈덕지게 추구하진 않습니다. 먹고 마시는 건 여전합니다. 라면도 먹고 중국음식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장어도 먹고. 막걸리도 마시고요. 여전히 인간 관계 커뮤니케이션이 먹고 마시는 자리에서 대부분 이뤄집니다.
얘기는 여대(女大)의 섬유예술과 강사인 김민희(캐릭터 이름 있으나 여러분이 읽기 쉽게 배우 이름으로 갑니다)가 외삼촌인 권해효를 학교로 부르며 시작합니다. 학교에서 매년 과별로 촌극제를 하는데, 김민희네 과에서 촌극을 준비하다 사고가 생깁니다. 학생 7명 중 3명이 나가버렸거든요. 왜냐. 연출을 맡은 남자가 학생 3명과 동시에 문어발 연애행각을 벌인 게 밝혀진거죠.
촌극제는 열흘 앞. 부랴부랴 대타로 불러들인 연출가가 김민희 외삼촌인 권해효인거고요. 권해효는 전에 배우도 하고 연출도 했는데, 블랙리스트 명단에 오르면서 낙향해 강릉에서 서점을 해요. 김민희네 과에는 힘있는 여교수가 있는데, 권해효 팬이라며 불러서 대화를 나눠요. 근데 이게 또 엄청 노골적이에요. 홍상수 영화에 이런 여성이 많이 나오죠. 남자 주인공을 칭송하고 우러러보는. 여교수는 권해효를 보더니 “진짜 훌륭하세요. 이렇게 멋지신 예술가가 저희 나라에 있다는게. 우리나라에서 나처럼 진짜 팬 없을 걸. 출연 연출 작품 다 봤거든요”라고 감탄 또 감탄합니다. 맛있는 거 먹자며 장어집에 데려가서는 “웃옷을 벗으시니 상체 장난 아니신대요. 너무 좋아보이세요”라고도 하고. 다른 자리에선 “저 돈 많이 모았어요. 10억 넘게 모았어요. 어떻게 이렇게 잘 모이는지”라며 돈 자랑도 합니다. 현실 플러팅도 이렇게 하면 무서울 것 같은데요? (물론 그녀는 나중에 목적을 달성합니다. 저렇게까지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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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어렵게 올린 촌극을 총장이 안 좋아합니다. 정치적인 배경이 있다고 봤나봐요. 총장뿐 아니고 관객도 촌극 끝나고 야유를 했다고 하니 재미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의기소침한 권해효와 학생 넷이 중국집에서 뒷풀이를 합니다. “니네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니” 묻는 권해효에게 학생이 각자 답을 내놓습니다. 아마 홍 감독의 마음도 일부 들어있을 것 같아서 아래에 적어봅니다. 어차피 말투가 요즘 대학생 말투가 아녜요. 홍 감독 말투지.
“사람한테 완전히 안길 수 있는 사람. 이 삶을 솔직한 삶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면서 진짜로 사랑하는 하루를 살아가고 싶습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옆에서 권해효가 “나두”라고 동조합니다. 이와 유사한 각오를 앞서 홍 감독의 다른 영화에서 다른 인물도 여러 번 했어요. “하루를 살아도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싶다”고요. 아마 이건 찐으로 홍 감독의 다짐이지 싶습니다.)
“마음에 드는 길이 나타날 때까지 찾아볼 겁니다. 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겁니다.”
“전 남을 찌르지 않습니다. 저도 사람입니다. 당하고 당하고 또 당해도. 구석에서 작은 불이라도 켜고 그렇게 지키겠습니다. 저도 사람임을 잊지 않고서.”
홍 감독은 과거 자신의 작업 방식에 대해 “개인적인 디테일을 써야 제 속에서 촉발되는 것이 있다”고 누차 말했습니다. 물론 그대로 복붙하는 것은 아니고 영화적으로 변형한다고 했죠. 재창조이긴 하겠으나, 마치 홍상수 감독의 음성지원이 되는 듯한 ‘수유천’의 일부 대사 보시겠습니다.
“너 정말 똑같구나, 아직 애기다, 얼굴이 애기야.”
“진짜 예술혼을 갖고 있는 사람이에요. 드물거든요. 완전 보물이에요.” (이어 박수까지)
-등장인물들, 김민희에게 너도나도 찬사를 던지며
“사람을 좋아하는 게 잘못입니까.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어요? 그동안 제가 한 건 아무 것도 아닌게 되는 거에요?”
-연출가, 자신의 문어발 애정 행각에 대한 비난에 항변하며
“평화롭고 깨끗해요. 지금이 좋아요. 평화롭게 일하는 게 제일 재밌어요. 매일 집중할 수 있고 일하는 게 재밌어요.”
-김민희, 자신의 일상을 설명하며
“전 실물에서 패턴을 얻는 게 맞는 거 같아요. 머리 속에 실물이 있으면 흔들림이 없어요.”
-김민희,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며. (평소 홍 감독이 늘 하던 말)
“너가 쟤를 정말 좋아했구나.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지.”
-김민희, 문어발 연출가가 좋다는 여학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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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제목에서 말씀드린 ‘이혼’ 부분으로. 권해효가 촌극이 끝나고 강릉으로 돌아가기 전에 김민희를 장어집에서 다시 만나요. 김민희는 권해효를 비난합니다. 여교수하고 잤느냐고 추궁하면서요. 외숙모는 어쩌고 불륜이냐는 거죠. 그러자 권해효는 “나도 편한 사람이 필요한데 저 사람(여교수)이 편한 사람이야”이라고 항변하죠. 그러면서 슬쩍 말해요. “나 이혼했어. 작년에. 10년 넘게 별거했더니 하게 해주더라.” 이 대삽니다. 저는 듣고 그런 생각 들었거든요. 이거 진짠가? 아닌가? 물론 이건 그냥 영화 대사일 수 있습니다. 혹은 홍 감독 지인 사례, 아니면 홍 감독의 순수한 바램일수도 있고요. (그런데 만약 홍 감독이 작년에 실제로 이혼했다면 대중이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마지막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잠시 자리를 뜬 김민희를 권해효가 찾습니다. 어딘가로 숨어 보이지 않던 김민희가 나타나 물어요. “저 찾으셨어요?” 권해효가 묻죠. “볼 거 있어?” 그리고 김민희가 던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대사. “아뇨, 아무 것도 없어요. 정말 아무 것도 없어요.” 이 대사와 함께 김민희 얼굴에서 화면 정지. 그리고 영화 끝. 이런 대사, 이런 앵글을 홀로 받으면서 빛나 보이지 않을 배우가 있을지.
수유천, 즉 물에 대한 이야기이다보니 작품을 두고 흐르는 물에 대한 비유로 해석이 나올 수 있겠습니다. 김민희가 만드는 섬유예술 작품도 물 패턴을 따서 만드니까요. 한강, 중랑천, 수유천 패턴을 따서 만든다고 나와요. 그런 해석은 홍 감독이 그렇게나 꺼려하는 ‘상투적’ 영화로 만드는 거라 어떨지 모르겠는데, 마지막 대사는 어쩔 수 없이 매우 상투적으로 들렸어요. 마지막 장면도 연출도 그렇고요. 아무리 로카르노 관계자들이 엄청나게 의미 부여를 하고 멋들어진 수사를 갖다 붙인다고 해도 마찬가지. 상찬을 한다면 그건 홍 감독의 작업에 대한 축적의 결과겠죠.
“김민희가 그렇게 연기를 잘했어?” 물으신다면 제 대답은 “아니요”. 딱 김민희처럼 했습니다. ‘수유천’의 김민희 연기보다 더 연기 잘할 배우를 저는 지금 앉은 자리에서 20명 이상 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다, 30명? 그러나 중요한 건 만든 영화를 창조한 감독이 내세운 예술적 대리자가 김민희라는 거죠. 김민희가 홍 감독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그런 영광은 불가했을테니까요. 홍 감독은 로카르노영화제에서 본인이 감독상(우리 선희, 2013)을 받았고, 정재영(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 2015)과 기주봉(강변호텔, 2018)에게 각각 남우주연상도 안겨줬습니다. 홍 감독은 김민희가 아니더라도 여러 배우에게 상을 안겼겠지만(실제로도 그랬지만), 김민희가 국제영화제에서 받은 상(베를린, 로카르노)은 전부 홍 감독 영화에서 나왔습니다. 김민희가 진정 연기 잘하는 글로벌 배우로 인정받으려면, 홍상수가 아닌 다른 감독이 만든 영화에서, 홍상수의 렌즈를 통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연기 역시 김민희스럽지 않게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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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번 ‘수유천’은 몇 분이나 보셨을까요. 29일까지 누적 관객 5073명. 작년 개봉한 ‘물안에서’ 3918명, ‘우리의 하루’ 4036명, 올해 4월에 개봉한 ‘여행자의 필요’ 8688명. 안타깝습니다. 대중예술가는 자신의 결과물을 봐줄 대중 없이는 존재하기 힘듭니다. 홍 감독은 관객 수에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요? 아니죠. 정말 개의치 않았으면 김민희와 둘이서 찍어서 안방에서 둘이서만 손잡고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매번 그렇게 국제영화제에 출품을 하는 건 끊임없이 타인의 인정과 갈채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느 대중예술인들이 다 그렇듯.
홍 감독은 김민희와 “사랑하는 사이”라고 2017년 공개적으로 밝힌 이후 대중, 특히 국내 관객의 시선으로부터 꽁꽁 숨어버리는 쪽을 선택했지만, 영화로는 끊임없이 발화하고 있습니다. 예술가로서 자신의 처지, 항변을 담아서요. 어떤 면에선 그의 작품이 그의 예술적 인스타그램이고 그의 대자보이기도 한 거죠. 그래서 “나 이혼했어” 대사가 더 제 귀에 들어왔나봅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이제는 그가 어떤 식으로든 개인사에 얽힌 매듭을 풀고 대중예술인으로 더 많이 인정받고 더 넓게 사랑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김민희씨도 배우로 더 활발하게 활동하시고요. 아, 그땐 인터뷰 요청은 설혹 거절을 하시더라도 본인이 직접 하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번 주에 부산 갑니다. 다음 레터는 아마도 부산에서 백수진 기자가 보내드릴 것 같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현장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긴 합니다. 여러분 ‘조커2′ 기다리시나요. 전 시사회에서 ‘조커2′ 보고 매우 실망했습니다. ‘투 머치(too much)에 중언부언'. 레터 일정 보고 다다음 순서 정도로 보내드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부산국제영화제 소식 기다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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