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아동용으로 제작한 그림책 ‘대동아 공동선언’. 연합국과 대항하기 위한 국방 강화책으로 제국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상을 유포했고, 대일본 웅변회 고단샤에서 이 그림책을 출판했다. 타커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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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
일본은 어떻게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할 수 있었을까
기시 도시히코 지음, 정문주 옮김, 조명철 감수 l 타커스 l 2만2000원
동아시아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까지 격동의 시기를 겪었다. 특히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고 서양과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한 일본은 서구식 근대화를 추구하며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이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구화를 추구하지만 단순히 서구 문물과 제도만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천황제를 부활하는 등 일본만의 특수한 형태로 근대화를 구축해나갔다. 일본은 또 이 시기 ‘일본이 한국, 만주, 동남아 등을 점령해야 한다’는 군국주의 논리로 무장하고 다른 나라를 끊임없이 침략하고 영토 확장을 꾀했다.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는 1894년 청일전쟁으로 시작해 1945년 태평양전쟁의 패배로 끝난 ‘제국 일본’에 주목한다. 이 시기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1914년 1차 세계대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 등 거의 10년에 한 번꼴로 전쟁을 벌였다. 이 책의 감수를 맡은 조명철 전 일본사학회 회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일본이 끊임없이 전쟁을 반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쟁을 선호하는 지도층이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과도한 군사비 예산을 흔쾌히 용인하고 전쟁을 열렬하게 지지해준 여론도 빼놓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일본 국민은 왜 그렇게 전쟁을 열렬하게 지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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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기시 도시히코 교토대 동남아시아지역연구연구소 교수는 전쟁과 프로파간다의 상관관계에서 그 답을 찾는다. 20년간 동아시아의 도화상 연구에 천착해온 저자는 제국 일본이 강렬한 시각 이미지를 활용해 국민에게 ‘전쟁열’을 부추기고 전쟁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줬다고 본다. 정보 매체를 통한 이미지와 정보 전달은 단순히 정보 전달에 그치지 않고 자국 여론을 통제하는 수단인 프로파간다 기능을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1890년대 이후 제국 일본이 어떤 매체를 프로파간다로서 활용했는지 시대순으로 살피며, 미디어와 저널리즘이 당시 일본 국민의 시대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톺아본다.
청일전쟁을 소재로 한 연극용 전쟁 니시키에인 ‘가와카미 연극 청일전쟁’. 타커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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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청일전쟁 시기엔 판화 보도가 유행했다. 석판화와 콜로타이프 등 판화 기술 때문에 쇠락의 길을 걸어가고 있던 다색 목판화(니시키에)는 ‘전쟁 니시키에’로 살길을 모색한다. 청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은 ‘신문 검열 긴급 칙령’을 공포하고, 외교·군사에 관한 사건을 신문이나 출판물에 게재하려 할 때는 행정청 또는 내무대신의 검열 허가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니시키에는 검열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판매에 지장이 생길 수 있어 검열 결과를 바로 받을 수 있었고, 속보성을 띤 니시키에는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다. 니시키에는 전쟁물 연극의 상연 포스터로 활용되면서 대중문화로 파고들었고, 프로파간다로서 작용한다. 당시 일본 국민이 얼마나 전쟁에 취해 있었는가 하면, 장난감 가게에서도 총, 군모 등의 장난감을 팔았고, 술집에서는 ‘황국’ ‘대승리’ ‘백전백승’ 같은 상표를 붙인 술을 판매했다고 한다.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를 쓴 기시 도시히코. @Miyuki Nakajim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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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05년에 진행된 러일전쟁 때는 인쇄술이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사진’을 찍은 신문이나 ‘러일전쟁 사진첩’과 같은 화보 잡지가 인기를 끌었다. 그림엽서도 인기였는데, 전쟁터 장병들에게 ‘위문 그림엽서’ 41종이 무료로 배포되거나 체신성이 나서 ‘전쟁 기념 그림엽서’ 등을 선보였다. 민관이 나서서 그림엽서를 만드니 전쟁 그림엽서를 수집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뿐만이 아니다. 19세기 말엔 흑백 무성영화(활동사진)가 등장했고, 러일전쟁을 다룬 쇼트 필름은 개봉 전에 티켓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10년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전쟁을 위한 총동원 체제가 갖춰졌는데, 요미우리신문과 같은 언론사가 프로파간다 역할을 자임했다. 이 신문은 ‘전시에 여성이 지녀야 할 마음가짐’ 따위의 보도를 하기도 했다. 또 우리가 진보적이라고 알고 있는 아사히신문조차도 ‘칭다오 함락’을 축하하는 기업 광고를 게재하고 전황을 보도했다. 이처럼 제국 일본 시기엔 언론사 역시도 전쟁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중국사변 성전 박람회 화보집(1938년). 타커스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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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프로파간다는 1930년대에 절정에 달한다. 중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관·민·산이 긴밀하게 연결됐으며, 이때 모든 전쟁 보도는 군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당시 내각정보부는 ‘사진 주보’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애국 행진곡’을 부르는 소년 소녀의 모습이 담기는 식이었다. 심지어 아사히신문사는 육군성과 해군성의 후원으로 ‘중국사변 성전 박람회’를 주최했는데, 대중에게 중일전쟁을 ‘성전’으로 각인시키기 위한 선전 활동 차원이었다. 1943년 제국 일본은 연합국과 대항하기 위한 국방 강화책을 열고 ‘대동아 공영권’을 구상하고 유포하는데, ‘대동아 공동선언’이라는 아동용 그림책까지 출판했다.
저자는 시기별로 사실에 기반해 건조하게 서술을 이어가지만, 그 사실을 따라가다 보면 국민 전체가 이렇게 광적으로 전쟁에 몰입할 수 있나 하는 충격이 몰려온다. 특히 당시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조차 평화가 아닌 전쟁을 각인시키기 위해 전쟁 관련 만화나 게임, 아동용 연극을 만들어 유포했다는 사실은 끔찍하기만 하다. 그리고 새삼스럽게 이미지가 갖고 있는 강한 힘을 인식하게 된다. 이미지를 왜 프로파간다로서 활용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지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침공도 계속되고 있다. 전쟁 사진과 전황을 전하는 속보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빠르게 전 세계로 전달되고 있다. 책을 보고 나니 전쟁 관련 이미지를 접할 때 그 이미지를 만든 주체가 누구인지, 또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살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 역시 “제국 일본 시기의 모습이 현대를 생각하는 계기를 제공하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책을 집필했다”고 밝혔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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