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방안은 안 밝혀
5년 전 통화로 트럼프 ‘탄핵’ 당하기도
트럼프 쳐다보는 젤렌스키 - 지난 2019년 9월 유엔 총회가 진행 중인 미국 뉴욕에 있는 한 호텔에서 25일 도널드 트럼프(오른쪽) 당시 미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가진 후 공동 기자회견을 위해 앉아 있는 모습. /AP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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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화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하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전 방안을 논의했다고 양측이 19일 밝혔다. 재집권하면 24시간 안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낼 수 있다고 주장해왔던 트럼프는 이날도 종전 계획을 언급했고, 젤렌스키는 러시아와 협상할 의향을 트럼프에게 밝혔다.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대화는 두 사람이 양국 정상으로 통화한 2019년 이후 5년 만에 이뤄졌다.
트럼프는 이날 소셜미디어에 올린 글을 통해 젤렌스키와 통화한 사실을 공개하고 자신이 당선되면 “양국(러시아·우크라이나)이 함께 모여 폭력을 끝내고 번영을 향한 길을 닦는 합의(deal)를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했다. 젤렌스키도 이날 자신의 X(옛 트위터)에 글을 올려 트럼프와 조만간 ‘개별 회동’을 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양측은 구체적인 종전 방법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북동부 하르키우 등 강제로 점령 중인 영토를 돌려주지 않으면 전쟁을 멈출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혀 왔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교착 상태에 빠진 채 희생자가 늘고 있다. 미국·유럽 등 우크라이나를 지원해 온 서방 국가들이 겉으로는 ‘지속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있지만 막대한 예산 투입을 언제까지 이어가야 할지에 대한 회의론도 대두하는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젤렌스키와 트럼프가 대화를 재개하면서 트럼프가 당선될 경우 어떤 방식으로건 종전을 추진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래픽=이철원 |
우크라이나 내부에선 러시아가 영토 일부를 점령한 현 상태 그대로 트럼프가 종전을 강요한다면, 러시아가 일단 공격을 멈췄다가 전열을 정비해 다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악순환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러시아는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를 침공해 점령한 다음 공격을 멈췄다가 8년 후인 2022년 재침공을 감행했다. 젤렌스키는 이런 이유로 ‘현상 유지’에 무게를 두는 러시아와의 종전 혹은 휴전 협상에 부정적이었다.
젤렌스키는 이날 트럼프와 통화 후 X에 올린 글에서 “(트럼프와) 공정하고 지속적인 평화를 위해 어떤 조치들이 필요할지 논의하기로 했다”면서 “나는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독립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초당적 지원이 중요하다고 언급했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앞서 트럼프가 유세 현장에서 총격을 당한 지 이틀 만인 지난 15일 기자회견 때 “오는 11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종전을 논의할) 제2차 평화회의를 추진하는데 회의엔 러시아 대표단도 참석해야 한다고 믿는다”면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협력하겠다”고도 했다. 그간 트럼프의 종전 공약에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고 비판해 온 젤렌스키의 미묘한 입장 선회에 대해 미 언론들은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둔 대처라고 분석하고 있다.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연일 ‘협상에 응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트럼프의 정책 고문인 키스 켈로그 미국우선주의연구소(AFPI) 미국안보센터장은 지난달 로이터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평화 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미국의 무기 제공을 중단하는 방안을 참모들에게 보고받고 트럼프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최근 러닝메이트(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J.D. 밴스(Vance) 상원 의원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지원을 멈추고, 전쟁을 끝내기 위해 러시아와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밝혀왔다. 최근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이 우크라이나가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다른 쪽으로 지원하는 방식의 종전안을 논의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존 허브스트 전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는 이날 둘 사이의 대화가 재개된 데 대해 “젤렌스키는 ‘테이블에 오른 협상안이 정의롭다면, 기꺼이 협상할 의지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앞으로 출범할 가능성이 있는 트럼프 행정부에 다가가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영국 채텀하우스의 오리시아 루체비치 러시아·유라시아 프로그램 부국장은 “일단은 젤렌스키가 협상 테이블에 앉을 의지가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트럼프 진영의 ‘종전 압박’에 젤렌스키가 응할 경우 완전한 영토 수복을 외쳐온 우크라이나의 입장이 후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고 영국 가디언은 전했다. 다만 트럼프가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우크라이나에 강요할 경우 젤렌스키와의 갈등이 다시 불거질 가능성도 크다. 젤렌스키는 지난달 언론 인터뷰 때 트럼프가 러시아와 부당한 협정을 맺도록 강요하면 ‘루저(loser·패배자)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했다.
2019년 7월 있었던 트럼프와 젤렌스키의 대화는 험악하게 끝났다. 트럼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한 지 한 주 만에 젤렌스키와 통화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맞수인 조 바이든 현 대통령과 아들 헌터 바이든에 대한 조사에 착수해 달라고 압박했다. 공화당은 바이든이 민주당 유력 대선 후보로 치고 나가자 헌터가 우크라이나의 천연가스 회사 ‘부리스마’의 이사로 일하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부통령이었던 아버지의 위세를 업고 부당 이득을 챙겼다는 등 각종 의혹을 전방위적으로 제기했다. 트럼프는 젤렌스키와의 이 통화를 발단으로 시작된 이른바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2019년 12월 권력 남용 및 의회 업무 방해 등 혐의로 탄핵 소추를 당했지만 상원에서 부결됐다. 스캔들 자체는 아직도 추가 증언·폭로 및 조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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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이민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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