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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나 대신 찍어줘"…프랑스의 대리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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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인이 다른 후보 기표해도 확인 못해…투표율 높이려 49년전 도입

이번 총선에 열흘 새 105만여명 신청…투표율 60∼70% 전망

연합뉴스

한 프랑스 시민이 남부 프랑스의 거리에 붙은 선거 포스터를 살펴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출신으로 현재 파리에 거주하는 한 30대 프랑스인 친구는 이번 조기 총선에서 고향에 사는 엄마에게 '대리 투표'를 부탁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스트라스부르까지 가기 어려우니 엄마에게 자신의 투표권을 맡긴다는 위임장을 온라인으로 작성해 제출했다고 한다.

"네가 원하는 후보에게 엄마가 실제 투표했는지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묻자 이 친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신뢰"라고 답했다.

친구는 "내가 투표해달라고 한 후보에게 엄마가 투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방법은 없다"며 "선거의 원칙은 비밀투표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소수 정당 소속으로 루앙 지역에 출마한 또 다른 지인에게서도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는 "확인할 수 있는 건 대리 투표자의 투표 여부뿐"이라며 "누구한테 표를 줬는지는 비밀이다. 대리 투표자가 다른 사람을 찍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대리 투표제는 '믿음'에 기반해 운영된다고 말했다.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를 '신성불가침의 원칙'처럼 암기해 온 한국인으로선 프랑스의 대리 투표제는 명백히 '직접 선거'에 어긋나는 제도다.

무엇보다 위임자가 일러준 후보에 대리자가 투표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은 제도의 취지를 의심케 한다.

대리 투표자가 많을수록 표심이 왜곡될 가능성은 커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스에서는 이 대리 투표제가 50년 가까이 유지돼 왔다.

성숙한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라면 투표를 맡긴 이의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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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경찰서 밖에 주차된 경찰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위임장을 작성하는 모습.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프랑스에서 대리 투표제는 1975년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 시절 유권자들의 투표 참여를 높이기 위해 도입됐다.

투표 당일 직업상의 이유나 건강 문제, 휴가, 장애 등의 이유로 투표소에 갈 수 없거나 해외에 있는 유권자가 다른 사람을 지정해 자신의 이름으로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직접 선거의 원칙을 포기한 셈이다.

투표를 남에게 맡기려는 유권자는 경찰서나 헌병대, 법원, 대사관에서 위임장 서류에 대리인의 선거인 번호와 생년월일 등을 써서 내면 된다. 최근엔 간편히 온라인 사이트로도 위임장 제출이 가능해졌다.

투표를 맡길 사람은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이웃, 직장 동료도 가능하다.

대리자는 단 한 명을 위해서만 대신 투표할 수 있다.

부작용이 많을 법하지만 대리 투표제는 오히려 더 간소해지고 있다.

이전엔 유권자가 직접 투표소에 갈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해야 했으나 2019년부터는 부재 증명서 제출 의무가 사라졌다.

2022년 1월부터는 본인과 다른 선거구에 등록된 유권자에게도 투표를 맡길 수 있게 됐다. 이 경우 대리인은 위임한 유권자의 선거구로 가서 투표해야 한다.

대리인 지정은 법적으로는 투표 당일까지도 가능하다. 단 행정 절차에 다소 시간이 걸리는 만큼 위임장을 늦게 쓸 경우 투표를 못 할 수도 있다.

위임장 해지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또 위임장을 썼더라도 대리인으로 지정한 유권자가 아직 대리 투표를 안 했다면 본인이 직접 투표소에 가서 투표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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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 경쟁 세 진영 대표 얼굴들.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좌파 진영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마누엘 봉파르 의원과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조르당 바르델라 극우 국민연합(RN) 대표. 3명은 오는 25일 총선에 앞서 3자 토론에 나선다.



조기 총선이 갑작스럽게 발표되면서 프랑스인들은 지금 대거 위임장 작성에 나서고 있다.

21일(현지시간) 내무부 자료에 따르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조기 총선을 발표한 다음 날인 이달 10일부터 20일까지 1차 투표를 위해 105만여 장의 대리 투표 위임장이 발급됐다. 프랑스 전체 등록 유권자 4천800만여명의 2.2%다.

이는 2022년 총선 당시 같은 기간(1차 투표 20일 전∼10일 전)에 발급된 위임장 수의 6.2배다.

그해 1차 투표를 위해 발급된 전체 대리 투표 위임장 102만여 장보다도 많다.

좌우 진영 대결이 뜨거운 이번 총선에 프랑스 유권자의 관심과 참여 의지도 커졌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겠다.

여론조사 기관 IFOP가 20일 공개한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이번 총선에 투표하겠다는 응답률은 64%로 나왔다. 2022년 총선 1차 투표율이 47.5%에 그친 것과 비교된다.

높은 투표율이 어느 진영에 유리할지 현재로선 예측하기 어렵다.

대리 투표제를 수십 년간 유지할 정도로 민주주의가 성숙했다고 '자부'하는 프랑스 공화국에 걸맞은 정당이 혜택을 얻길 기대한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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