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 된 집권당 '다급한 공세' vs 몸 사리는 선두주자 제1야당
보수당 리시 수낵 총리와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 |
(런던=연합뉴스) 김지연 특파원 = "그들도 집권하면 달라질지 모른다. 지금은 겁에 질린 것 같다. 1992년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을 테니까."
영국에 10년 넘게 주재한 한 프랑스 특파원은 집권 보수당에 지지율이 두 배 앞선 제1야당 노동당이 총선에 임하는 자세에 대해 이렇게 촌평했다.
현재 영국 주재 외신 기자들의 최대 현안은 내달 4일에 치러지는 총선인데 다수의 외신 기자가 노동당의 취재 비협조를 성토하자 보인 반응이었다.
1992년은 사전 여론조사와 달리 보수당이 하원 과반인 336석을 얻어 여유롭게 승리한 총선이 치러진 해다.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가 인두세 도입 등으로 비판받은 1990년 보수당은 노동당에 20%포인트 넘는 격차로 뒤지기까지 했고 그해 말 대처 총리 사임 이후에도 양당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했으나 결국 보수당이 정권을 유지했다.
노동당이 그때처럼 여론조사와 다른 총선 결과가 나올 것을 우려해 '디리스크'(위험요인 제거) 전략으로 신중함을 넘어 소극적인 자세를 보인다는 것이다.
14년간 집권했으나 1834년 창당 이래 최대 규모의 참패가 점쳐지는 보수당은 노동당과 정반대로 '추격자'로서 다급한 모습이 역력하다.
지난 13일 외신기자협회(FPA)가 연 기자회견에 전직 총리이자 외무장관인 데이비드 캐머런이 나선 것이 일례다.
이 회견엔 연합뉴스를 비롯한 외국 매체 기자 172명이 몰렸다. FPA가 주최한 행사 중 역대 최대 기록이었다.
외신 기자들이 쏟아낸 질문은 사실 보수당에 유리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캐머런 장관이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패배한 책임을 지고 총리직을 사임한 데 후회한 적이 있는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등 브렉시트 후폭풍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다.
브렉시트는 국민투표부터 협상, 발효까지 영국 사회에 수년간 대혼란을 야기한 보수당의 최대 난제다. 물가 급등, 경제정책 실책과 함께 보수당을 현재의 위기로 몰아간 최대 원인이기도 하다.
영국 정치와 정부에 대한 국민 신뢰도가 바닥까지 떨어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수 유권자가 영국개혁당이 아닌 보수당을 찍을 이유가 무엇인지, 심지어 보수당이 곧 실각할 처지에 외신 기자들 앞에 선 이유가 무엇인지 등 매운 질문이 쏟아졌다.
이런 질문에 캐머런 장관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보수당 정부와 자신의 결정을 철벽 옹호했다. 내각의 주요 인사이자 당을 대변하는 입장인 만큼 취재진에 만족스러운 답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막힘은 없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외무장관(2024.6.13) |
보수당 수장인 리시 수낵 총리도 최대한 많이 유권자들에게 노출돼 큰 목소리를 내겠다는 절박한 심정을 고스란히 표출하고 있다.
거센 역풍도 맞았다. 언론 인터뷰를 위해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에 중대한 행사로 주요국 정상이 즐비한 프랑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에 불참하는 대형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
이에 더해 비관적인 총선 전망이나 '총선일 맞히기 도박' 스캔들 같은 부정적 뉴스가 많기는 하지만 화제성만큼은 높게 유지하고 있다.
반면 노동당은 선거 정국에서 존재감이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고 있다.
올해 들어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보수당에 20%포인트 이상 앞선 지지율을 누리고 있고 의석수로도 압도적 과반을 차지해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이끈 1997년 총선을 넘어선 압승이 예측되는데도 그렇다.
키어 스타머 노동당 대표는 지난 13일 총선 정책공약 발표에서 "부의 창출"을 최우선시하겠다면서 경제 성장과 안정을 강조했다.
팔레스타인 국가 인정과 같이 진보적인 당 색을 드러낼 수 있는 공약도 전면에 세우지 않았다. 공약집 한구석에 있는 것을 일부 언론이 찾아내 보도하는 데 그쳤을 정도다.
좌파 성향이 강했던 제러미 코빈 대표에게서 당권을 물려받은 뒤 중도화 전략을 택한 스타머 대표의 이름에는 '명나라 화병'이란 표현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1997년 총선에서 블레어 당시 노동당 대표가 깨지기 쉬운 아름다운 화병을 들고 광택을 낸 매끄러운 바닥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조심스러운 선거 전략을 쓰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번 총선에서 노동당이 역전패당한 1992년이 아니라 토니 블레어가 이끄는 노동당이 압승한 1997년을 재현할지 미리 알 수는 없다.
스타머 대표가 총리직에 오른다면 블레어가 펼친 '제3의 길'을 따를지 노동당 본연의 색채를 드러낼지도 노동당이 얼마만큼의 규모로 승리할지에 달린 일이다.
분명한 것은 이번에 반드시 이기겠다는 의지만큼은 결연해 보인다는 점이다.
스타머 대표는 총선 공약 발표일에 새로운 정책이 왜 없는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우리에게 마법 지팡이는 없다. 이건 모자에서 토끼를 꺼내는 것도, 팬터마임을 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서커스를 꾸리는 게 아니라 총리 후보로 뛰고 있다."
'제3의 길' 표방한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 |
cheror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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