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하며 서예를 익힌 오병철씨가 2019년 경향신문과 인터뷰할 당시 그가 운영 중이던 검도장에서 작품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창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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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을 앞둔 1968년 어느 날이었다. 당시 30대였던 경기 화성 비봉농고 교사 오병철씨(87)는 교무실에서 학생들과 학교 신문을 편집하다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오씨는 자신이 이른바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수차례 물고문과 구타를 당하면서 알게 됐다. 그는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약 20년을 감옥에서 갇혔다가 사면으로 풀려났다.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오씨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로부터 불법구금과 고문·가혹행위를 당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대규모 공안사건이다. 그해 8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과 자금을 받은 지하조직 ‘통일혁명당’ 158명을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중 73명이 송치됐고, 주범 4명은 사형 선고를 받았다. 고 신영복 전 성공회대 교수도 연루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20년을 복역했다.
진실화해위 조사에 따르면 중앙정보부는 영장 없이 오씨를 검거하고 체포 이튿날인 7월28일에야 구속영장을 발부받았다. 조사과정에서는 물고문, 구타 등 고문·가혹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사관 등으로부터 구타를 당해 오씨의 발등이 부러지기도 했다.
오씨는 1956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통일혁명당 지도부 중 한 명으로 사형된 이문규씨와 ‘절친하다’는 이유로 수사 대상이 됐다. 오씨는 이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수사관들이 이름도 모르는 조직 이름을 대면서, ‘친구가 북에 다녀오지 않았냐’면서 무지막지하게 저를 다뤘다”며 “이방 저방 소리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여러 사람이 달라들어 완전히 녹초가 됐었다”고 했다.
그를 더 괴롭게 한 것은 부인과 당시 갓 돌이 지난 딸이 함께 연행됐다는 사실이다. 오씨는 진실화해위에 “조사과정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옆방에 배치해 정신적 고통을 주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통화에서 “제가 잡혀갈 때 집사람과 돌 지난 딸까지 밤중에 서울로 압송됐다”며 “일종의 간접 고문이었다”고 했다.
오씨는 1969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해 같은해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 그가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은 20년이 흐른 1988년 ‘양심수 대사면’으로 가석방되면서였다. 오씨는 2021년까지 서울 공덕동에서 ‘제삼관’이라는 검도장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은 검도장을 정리한 후 공부를 하며 지내고 있다”고 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오씨에 대한 가혹행위 등을 사과하고 화해 조치를 다할 것과 형사소송법이 정한 바에 따른 재심 등의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오씨는 “얼떨떨하다”며 “관청 근처에도 가기 싫다는 마음이 앞섰지만 재심 신청을 고려 중”이라고 했다.
☞ 오병철씨 “감옥에서 글씨 쓰며 분노를 다스렸는데…”
https://www.khan.co.kr/people/people-general/article/201904102116025
전지현 기자 jhyu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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