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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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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밸런타인데이보다 '여성의 날'에 꽃이 많이 팔리는 이유 [아세안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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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아세안 여성의 삶
여성 경제활동 인구 46.8%, 한국보다 높아
"사회주의 베트남, '여성 권리' 중요 이념"
다보스 선정 '아시아 성평등 국가' 동남아에

편집자주

2023년 2월 한국일보의 세 번째 베트남 특파원으로 부임한 허경주 특파원이 ‘아세안 속으로’를 통해 혼자 알고 넘어가기 아까운 동남아시아 각국 사회·생활상을 소개합니다. 거리는 가깝지만 의외로 잘 몰랐던 아세안 10개국 이야기, 격주 금요일마다 함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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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 여성박물관에서 사진작가 르빅의 전시회를 보러온 여성들이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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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7일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에 위치한 여성박물관은 여성 수십 명과 어린이, 외국인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이들은 베트남 유명 사진작가 르빅(52)의 여성의 날 기념 사진전을 관람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주제는 ‘어머니의 사랑’. 추운 북부 산악지대에서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일을 하는 소수민족 여성, 시골에서 노모와 전통 장식을 만드는 딸 등 르빅이 20년간 전국을 종횡무진 누비며 카메라에 담은 현지 여성 모습이 전시됐다.

르빅은 “어느 곳에 살든, 어떤 민족이든, 어떤 상황에 있든 베트남 여성은 언제나 강인하고 열심히 노력해왔다는 사실을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날을 맞아 회사 동료와 단체 관람을 왔다는 응우옌티프엉(39)은 “강한 생활력으로 생계를 책임져 온 어머니 세대를 떠올렸다”며 “노동 장소는 바뀌었지만 지금까지도 여성들은 경제 활동 주체로 가정과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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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을 하루 앞둔 7일 베트남 하노이 여성박물관에 사진작가 르빅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강인한 여성들의 모습이 담겼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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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여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연상될까. 혹자는 전통 의상을 입고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채 수줍게 미소 짓는 청년을, 누군가는 시부모와 가족을 살뜰히 챙기는 살림꾼을 떠올릴 수 있다.

국제결혼 중개업소도 이런 세간의 인식을 활용한다. ‘XXX만원, 확실한 검증’이나 ‘철저한 사후 관리’ 같은 문구로 여성을 노골적으로 상품화하기도 한다. ‘유순하고 소극적이며 남성에게 순종적’이라는 색안경을 쓴 채 동남아 여성을 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는 편견에 불과하다. 문화, 종교, 정치 형태에 따라 모습이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동남아 여성의 역할과 삶이 남성, 가정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부 국가는 여성의 사회·정치 참여 비율이 한국보다 높거나 남성과 여성의 격차가 작은 경우도 많다. 동남아 여성의 생활상을 각종 수치를 통해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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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인 8일 베트남 하노이 상업대학교에서 학생들이 여학우들에게 나눠줄 꽃을 정리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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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회 분야 여성 활동 왕성


베트남에서는 여성들이 정치, 경제, 사회 등 각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한다. 베트남 통계청에 따르면 2022년 말 기준 전체 경제활동인구는 5,060만 명이다. 이 중 성이 46.8%(2,368만 명)를 차지했다. 남성(53.2%)과 별 차이 없는 수준이다. 한국의 경제활동 인구(2,903만7,000명·지난해 말 기준) 중 여성 비율은 43.8%, 남성은 56.2%였다.

베트남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한국의 8분의 1 수준이지만, 여성의 사회 진출은 더 활발한 셈이다. 출퇴근 시간엔 정장을 차려입고 하이힐을 신은 채 오토바이를 타는 여성 직장인으로 도로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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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 기자


여성 역할은 단순 노동에 그치지 않는다. 현지 경제전문매체 VN이코노미는 “중소기업 20% 이상이 여성 최고경영자(CEO) 소유이고, 베트남 내 전체 사업체에서도 고위직 절반이 여성”이라고 설명했다. 중앙 정치 진출도 활발하다. 15기(2021~2026년) 국회 대표(의원) 499명 중 151명(30.3%)이 여성이다. 한국은 21대 국회 기준 19.1%다.

채수홍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소장은 “베트남은 여성의 권리를 중요한 실현 목표 중 하나로 삼는다”며 “과거 가부장제를 경험했지만, 근대화와 사회주의를 거치며 평등한 인간관계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발전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처럼 유교 문화권이긴 하지만,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영향을 받으면서 남녀 지위가 거의 대등한 수준이 됐다는 의미다. 베트남은 헌법(63조)으로 1992년부터 여성에 대한 모든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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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수도 하노이 시내 퇴근길 풍경. 헬멧과 마스크를 착용한 여성들이 남성들 틈에 끼어 오토바이로 퇴근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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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날 1년에 2차례 기념하는 베트남


베트남은 이렇게 강인하고 헌신적인 여성들을 일 년에 두 차례 기린다. 바로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과 베트남 여성의 날(10월 20일)이다. 공휴일은 아니지만 남성들은 연인, 아내, 스승, 어머니에게 꽃을 선물한다.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는 크고 작은 행사를 개최하고, 남자 직원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여직원들에게 줄 다과와 꽃을 준비하기도 한다.

실제 지난 8일 베트남 하노이 거리에서는 수많은 상인들이 형형색색 꽃다발과 인형을 판매했다. 가게마다 ‘세계여성의 날을 축하한다’거나 ‘당신의 사랑을 전하라’는 현수막이 넘실댔다. 시민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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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인 8일 베트남 하노이 시내에서 여성의 날을 기념하는 회사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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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8년차 직장인 응우옌투안안은 “오늘 일찍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꽃을 안겨주지 않으면 몇 달간 잔소리에 시달릴 것”이라며 “여성의 날을 그냥 지나갔다가 싸우거나 헤어지는 연인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시기가 되면 꽃 가격도 뛴다. 현지 매체 베트남플러스는 “밸런타인데이(2월 14일)보다 여성의 날 꽃을 찾는 고객 수가 더 많다”며 “장미와 해바라기 등 생화 가격이 20% 올랐다”고 전했다. 여성의 날을 앞두고 하노이와 호찌민 등 주요 도시 유명 레스토랑은 ‘예약 전쟁’을 치른다. 당일 오후 데이트에 나서는 시민들로 통행량이 급격히 증가하면서 크리스마스와 함께 ‘1년 중 교통정체가 가장 심한 날’로 꼽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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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성의 날인 8일 베트남 수도 하노이에 위치한 한 꽃집에 형형색색의 꽃바구니가 진열돼 있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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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다 성평등 순위 높은 동남아


이웃 국가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동남아 국가는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 ‘성(性) 격차 지수’에서도 예상 밖 높은 점수를 얻었다. WEF는 2006년부터 매년 국가별로 △여성의 경제 참여·기회 △교육 수준 △건강 △정치적 기회 4개 부문을 평가하는데, 지수가 1에 가까울수록 양성평등이 잘 이뤄졌다고 본다.

필리핀은 지난해 지수 0.791로 146개국 중 16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지역을 통틀어 가장 높다. 그 뒤를 싱가포르(49위) 라오스(54위) 베트남(72위) 태국(74위)이 이었다. 한국(105위)과 중국(107위) 일본(125위) 등 동아시아 국가는 100위 밖으로 밀렸다. 인도네시아(87위) 브루나이(96위) 말레이시아(102위) 등 무슬림 신자가 많거나 이슬람교가 국교인 국가보다도 순위가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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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 기자


성 격차 지수는 각국의 경제 발전 정도나 여성 인권의 절대 수준이 아닌, ‘성별 격차’에만 초점을 맞춘다. 때문에 남녀 모두 수치가 낮더라도 격차가 크게 벌어진 국가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여성 지위를 객관적으로 보여주기에 다소 한계가 있지만, 적어도 ‘관리직 중 여성 비율’ ‘승진 속도’ ‘노동시장 참여율’ ‘출생 시 남녀 성비 불균형’ 측면에서는 한국보다 동남아의 간극이 적다는 의미다.

전문가들은 배경을 △모계 중시 전통 △경제 급성장 △빠른 도시화 등에서 찾는다. 바버라 왓슨 안다야 하와이대 동남아시아 연구센터 소장은 미국 싱크탱크 아시아소사이어티 기고에서 “동남아는 전통적으로 모계와 부계를 모두 인정해온 까닭에 동아시아나 남아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성 지위가 높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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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대입 수능일이던 지난해 7월 1일 수도 하노이의 한 수험장으로 고등학생들이 들어서고 있다. 전문가들은 동남아시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일자리가 늘면서 여성들의 생활 수준과 교육 수준이 늘어난 점도 여성 권리 상승과 성평등에 기여했다고 본다. 하노이=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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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에반스 캐나다 토론토대 멍크국제학센터 객원교수는 “경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은 성평등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며 “20세기 들어 여성 고용이 급증하고 교육 수준이 높아진 점도 동남아 주요국의 양성 평등을 불러왔다”고 말했다.

다만 ‘완전한 평등’까진 갈 길이 멀다. WEF는 지난해 보고서에서 “필리핀과 베트남 여성의 근로소득은 남성의 각각 71.6%, 81.4%에 그쳤다”며 “인도네시아는 남성이 1달러를 벌 때 여성은 51.9센트밖에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 노동부도 13일 지난해 여성 중위 소득이 남성보다 14.3% 적었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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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북부 하장성에서 한 여자아이가 관광객들에게 꽃을 팔고 있다. 아직 도시가 아닌 농촌, 산악지대에서는 남아선호사상과 조혼 등의 악습이 남아있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하장=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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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못하는 곳에서는 악습도 남아있다. 맷 잭슨 유엔인구기금(UNFPA) 베트남 대표는 “농촌이나 산악 지역에서 조혼과 남아 선호를 종식시키려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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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글·사진 허경주 특파원 fairyhk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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