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진행에 하루하루가 침잠 연속
여야 합의에도 특별법 개정 ‘깜깜’
‘기다려라’라는 말만 듣는 상황에서
“구제 나서는 정당이라면 찍을 것”
4·10 총선을 앞두고 거대 양당의 대립이 선거판을 지배하고 있다. 여야는 상대방을 향한 심판론을 내세웠다. 연일 증오의 표현을 쏟아내며 국민을 대변한다고 자처한다. 각 당 내부의 총선 후보 공천이 시끄럽지만 시민의 삶과는 관련이 적어 보인다. 거대 양당과 그 체제를 떠받치는 강성 팬덤만이 총선의 주인공은 아니다. 선거는 5000만 시민의 의사가 발산되는 축제다. 어느 누구도 소외돼선 안 되는 민주주의의 꽃이다. 전세사기 피해자, 결혼 이주민, 플랫폼 노동자, 성 소수자, 10대, 수도권에서 소외된 지역 거주자, 험지에 계속 도전하는 정치인, 꾸준히 소수정당에 투표해온 유권자···이들도 이번 선거의 주인이다. 경향신문은 총선에서 대변되지 못하는 시민들의 ‘다른’ 목소리를 릴레이로 싣는다.
전세사기 피해자 이미란씨(34)와 김보경씨(24)가 21일 건물에 붙은 세입자들의 글을 보고 있다. 문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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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사기 피해를 겪으면서 투표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어요. ‘어쩔 수 없다’ ‘기다려라’라는 말만 듣는 상황에서 어느 정당이라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내준다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투표하고 싶어요.”
2년 전 경기도 안산에서 서울 영등포구로 올라온 사회초년생 김보경씨(24)의 삶은 전세사기 피해 이후로 조금 기울었다. 지난해 11월 자신이 세 들어 살던 건물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관리소장의 문자를 받았을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안이 벙벙했고 24살에 1억1000만원이라는 큰 금액을 잃게 됐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김씨와 같이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은 관리소장과 중개사로부터 “별일 아니니 가만히 있으면 해결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경매 절차가 진행되고 집주인이 갚지 못하는 보증금이 100억원에 가까울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됐을 때부터는 하루하루가 침잠의 연속이었다.
집에서 30분 거리, 아무렇지 않게 봐왔던 국회가 달리 보인 것은 그때부터였다. 전세제도의 허점을 노린 부동산 사기가 전국적으로 횡행하고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개인의 부주의로만 치부할 수는 없는 사회적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의 피해자 대부분이 자산이 적은 2030 ‘사초생’(사회초년생)이라는 점에서 더 정치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야 모두 표심에 호소하는 총선이라면 정치권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을까. 지난 18일과 20일 경향신문이 각각 만난 전세사기 피해자 이미란씨(34)와 김보경씨는 큰 기대를 걸지 않는다면서도 실효성 있는 공약을 내는 정당에는 투표할 생각이 있다고 입을 모았다. 이씨는 “이번 총선에 전세사기 피해의 영향이 있을 것 같다”며 “바라는 건 제발 실질적으로 정말 지원받을 수 있는 부분을 제대로 공약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정치권에 실질적인 대응을 바라는 건 현행 전세사기특별법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야는 지난해 우선매수권 부여, 금융·법률지원 등을 골자로 하는 전세사기특별법을 제정했다. 이씨와 김씨는 지난달 국토교통부로부터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을 받았다.
김씨는 “그나마 대출해주고 20년 동안 상환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게 눈에 들어오는데 돈(보증금)을 돌려받는 것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이씨도 “전혀 도움이 안 된다”며 “대부분 세입자들이 대출을 받아 전세를 들어올 텐데 대출 연장이 안 되면 갑자기 1억원 전후의 돈을 갚아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대책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일부 세입자들의 경우 은행의 대출 연장이 막히면 사채를 쓸 처지에 내몰릴 것이라고 주장했다.
특별법 개정까지는 앞길이 깜깜하다. 여야는 특별법을 제정할 때 시행 후 6개월마다 입법을 보완하자고 합의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12월 ‘선구제 후회수’를 골자로 한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을 주요 10대 법안 중 하나로 제안했고, 국민의힘은 반대했다. 이 같은 상황은 총선 전 마지막 임시국회가 진행 중인 지금도 그대로다. 이씨는 “항상 어떤 이슈가 일어나면 국회에서는 갑론을박을 이어가다 시간이 지나고, 국민 관심이 흐려지면 본인들도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며 “대책이나 지원을 끝까지 진심으로 하는 정치인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이미란씨(34)와 김보경씨(24)가 21일 건물 우편함에 꽂힌 우편물들을 보고 있다. 문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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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정치에 기대를 거는 건 정치가 나서면 변하기 때문이다. 매일 밤 혼자 울며 현실을 회피하고 싶었다던 김씨는 같은 건물 세입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마음속 깊은 곳에 가라앉았던 목소리를 끌어내기로 했다. 지역구 국회의원 사무실부터 구청, 경찰서 등 목소리를 들어줄 만한 곳이면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대통령실, 국무총리실, 국토교통부에 탄원서를 내기도 했다. 김씨는 “이렇게 목소리를 안 내면 아무도 모른다”며 “목소리를 내고 움직이니까 기사도 나고 구청에서도 법률 지원을 해준다고 연락이 왔다. 계속 두드리다 보면 답이 나오지 않겠냐는 희망을 품게 됐다”고 말했다.
총선에도 관심이 생겼다. 이씨는 “아무래도 선거기간이니 이 기간에 목소리를 낼수록 좀 더 전세사기 구제에 도움이 되는 정책이나 방안이 선거공약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로선 실망이 더 크다. 여야가 정쟁으로 싸우기만 하고 정작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공약은 제대로 내놓은 게 없기 때문이다. 이씨는 “회사가 여의도라 국회와 가깝지만 마음이 가까운 건 아니다. 그분들이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진심으로 다가온 적이 있나”라고 말했다.
김씨는 “민생과 안위를 위한 곳인데 권력 싸움이 먼저가 되는 것 같다”며 “싸움이 유치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제발 그만 좀 싸우고 실효성 있는 대응책이나 깊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입장에서 굳이 점수를 주자면 야당 쪽이다. 김씨는 “야당은 그래도 전세사기 피해자들을 위한 접수센터도 있고 특별법 개정에 대한 적극성도 여당보다는 더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김보경씨(24)가 피해자들의 의견을 모아 제출한 탄원서. 김보경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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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정치권의 관심이 필요한 이유로 피해자 대부분이 20대, 30대의 젊은 사회초년생이라는 점을 꼽았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울에서 전세로 사는 사람 대부분은 지방에서 올라와 중소기업청년 전세대출 등으로 방을 얻는다. 부산에서 올라온 이씨는 “보증금은 거의 몇 년씩 모은 돈이고 거기에 대출금까지 생각하면 앞으로 다 갚으려면 못해도 10년은 벌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크다”며 “직장에서 일하고 저녁 늦게 집에 돌아와 뭔가 정치적으로 대단한 걸 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어려워진 현실 속에서 청년들이 미래 계획을 세우기도 쉽지 않다. 김씨도 마찬가지다. 안산에서 먼 길을 통근하다가 처음 자취방을 갖게 됐을 때 느꼈던 설렘은 이젠 분노로 바뀌었다. “어떤 어른들은 차라리 파산하라고 한다. 전세사기 뉴스들 속 사기꾼은 부모님 세대인데 사기를 당하고 피해 보는 건 20대 젊은 ‘사초생’인 게 화가 났다.”
바라는 점은 단 한 가지, 보증금을 돌려받는 것이다. 총선이 있기에 이들에게 ‘골든타임’은 아직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피해자들을 위한 주거지원이나 임대인들이 세입자들한테 상환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하는 공약이 나왔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라도 꼭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보증을 서든 어떻게 해서든 대출을 연장해주는 게 전세사기 피해자들한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김씨와 이씨는 4월 총선을 기다리고 있다.
문광호 기자 moonli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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