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 할아버지가 2018년 8월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대법원의 재판 거래 의혹을 규탄하는 기자회견 후 탄원서를 제출하기 위해 민원실로 향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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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사건을 심리한 1심 법원은 판결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일본 기업을 대리한 김앤장 법률사무소 측이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일본 기업 승소로 이끌기 위해 각종 협의를 한 사실을 인정했다. 피해자들의 승소 확정을 우려한 외교부가 대법원에 의견서를 내기까지 조태열 외교부 장관(당시 외교부 2차관)이 한 역할도 언급했다.
3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5-1부(이종민·임정택·민소영)의 양 전 대법원장 판결을 살펴보면, 재판부는 2014~2016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배 사건이 대법원 재상고심에 올라가자 당시 청와대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이 여러 차례 접촉해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고 인정했다.
법원 “김앤장, 법률 외적인 설득방안 추진..청와대에 상고이유서 전달”
재판부가 인정한 사실관계에 의하면, 김앤장의 한상호 변호사는 2014년 11월 김앤장 고문이던 현홍주 전 주미대사,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문제점과 관련해 국무총리의 대통령에 대한 주례보고가 있었고, 대통령도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도 대법원에 얘기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이를 계기로 김앤장은 일본 기업에 유리한 한국 외교부의 의견을 대법원에 제시하는 ‘법률 외적인 설득방안’을 추진한다. 2012년 대법원 소부가 내린 피해자들 승소 판결을 재상고심에서 뒤집으려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사건을 회부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외교부가 피해자들 승소 확정시 우려된다는 내용의 의견서를 대법원에 제출토록 하자는 것이었다. 김앤장은 보안을 위해 극소수만 참여하는 대응팀을 만들었다. 일본 기업은 이 방안을 승인했다. 현 전 대사와 유 전 장관은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과 여러 차례 식사하면서 정보를 파악한 것으로 판결에 나온다.
김앤장의 접촉에 윤 전 장관이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대해 재판부는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은 채 담당 국장과 이야기해보라는 정도로 회피성 답변을 하면서도,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은 대법원의 요청이 있어야 한다’는 외교부의 입장 내지 분위기를 살짝 피력했다”고 적었다. 이후 윤 전 장관 말대로 유 전 장관이 담당 국장을 만나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눴다.
2015년 2월 김기춘 비서실장은 곽병훈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법무비서관(김앤장 변호사)을 불러 ‘2012년 대법원 판결로 인해 한·일 관계에 큰 어려움이 있고, 외교부가 매우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외교부 요청으로 대법원에서 의견서를 제출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최근에 그 제도가 시행돼 외교부가 의견서를 제출하기로 했으니 잘 챙겨보라’고 지시했다.
한상호 변호사는 곽 전 비서관을 찾아가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인데 외교부에서 크게 걱정을 하고 있다”며 “잘 챙겨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면서 김앤장이 작성한 강제징용 사건의 상고이유서와 쟁점 요약 문건을 곽 전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김앤장, 외교부, 청와대와 수시로 연락하며 의견서 제출 방안을 논의했다.
한 변호사는 일본 기업에는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외교부 의견서 제출 문제가 대법원 내부에서 대법원장 및 법원행정처장까지 보고된 것으로 보인다”며 “전원합의체 회부 및 다른 대법관들을 설득하기 위해 외교부 의견서를 제출받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알렸다.
사법농단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26일 오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원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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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가 여론 악화 등을 이유로 의견서를 제출하지 않자, 청와대와 임 전 차장은 외교부에 독촉을 하기도 했다. 2015년 5월 임 전 차장은 한 변호사에게 전화해 “정부에서는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 때문에 걱정이 많다. 대법원도 상당히 고민이다. (…) 대법원에서는 새로 제출된 증거를 근거로 소부에서 파기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원칙대로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그러려면 전원합의체 회부의 근거 및 다른 대법관 설득을 위해 외교부·법무부의 공식적인 의견서가 필요하다”며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를 만들었으나 외교부는 대법원의 정식 요청이 있어야 의견서 제출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니 피고 측 소송대리인인 김앤장 이름으로 의견조회 요청서를 내달라”고 했다. 임 전 차장은 김앤장으로부터 요청서 초안을 받아 수정의견을 줬다.
외교부가 의견서 내용과 제출 시기를 법원행정처와 조율하는 과정에서 조태열 현 외교부 장관의 이름이 등장한다. 조 장관은 2015년 당시 외교부 2차관으로 임 전 차장을 만나 절차를 직접 협의했다. 외교부 실무자들과 회의를 갖고 의견서에 담길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기도 했다.
판결에 따르면 2016년 조 장관은 임 전 차장에게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긴 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한·일 관계, 국제소송으로 비화됐을 경우의 문제, 외부에 공개될 경우의 문제 등으로 인해 부담을 느껴 의견서 내용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이에 임 전 차장이 “의견서에 각주를 많이 활용해 외국사례 등 사실관계를 중심으로 건조한 내용의 의견서를 제출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조언했고, 조 장관은 실무자들에게 임 전 차장 조언대로 의견서를 보완하라고 지시했다.
전국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30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서성일 선임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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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강제징용 재판개입성 문건들..“임종헌 개인이 스스로 생각”
법원행정처 심의관은 강제징용 사건을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등의 사건 결론과 외교부에 대한 절차적 배려 방안 등을 검토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찰은 사법부 이익 도모를 위해 구체적인 사건의 재판 결론과 절차를 검토하는 것 자체가 사법행정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고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한다면서 양 전 대법원장을 직권남용죄로 기소했다.
그러나 양 전 대법원장 사건을 심리한 재판부는 법원행정처 문건들에 대해 ‘재판 개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작성된 게 아니라면 위법하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댔다.
재판부는 “사법행정권자가 계속 중인 구체적인 특정 사건과 관련한 정책적·정무적 관점에서의 검토 및 내부 보고서 작성 과정에서 해당 재판의 절차 진행 및 처리 방향 등에 관해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검토하게 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한 행위임은 분명하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직권남용에 이를 정도로 위법·부당했는지는 보고서 작성 지시가 사법행정권자가 재판 개입의 의도를 갖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현실적·구체적인 계획 아래 그 과정의 일부로서 행한 것인지를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보고서가 실제 재판 개입의 실행을 전제로 한 게 아니라면 위법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 행정조직의 ‘비공개 내부 보고용 문서’는 여러 시각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검토가 이뤄질 수 있다면서 일부 부적절한 내용이 있어도 위법하지는 않다고 했다. 재판부는 보고서 내용이 임 전 차장의 ‘개인 생각’이거나 ‘스스로의 판단’이라고도 했다.
재판부는 참고인 의견서 제출 제도는 법원행정처가 이전부터 정책적 필요성을 검토해오던 것으로 강제징용 사건 때문에만 도입된 것은 아니라고 봤다. 설령 임 전 차장이 외교부 요청을 듣고 제도 도입을 검토시켰더라도 임 전 차장에게 대법원 재판을 좌지우지할 권한이 없고, 외교부 의견을 재판에 반영·관철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했다.
양승태, 김앤장 만나 강제징용 이야기 들었지만..법원 “의례적 공감표시”
판결을 보더라도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외교부·김앤장의 협의를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변호사는 2015년 5월과 11월, 2016년 10월 사석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만나 ‘외교부가 소극적이어서 걱정이다’, ‘김앤장에서 외교부 의견서 제출 촉구서를 대법원에 제출하겠다’, ‘촉구서를 제출했다’는 등의 말을 했다. 임 전 차장은 2016년 9월 의견서 제출을 논의하러 외교부에 간다고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보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한 변호사의 말에 양 전 대법원장이 ‘그러냐, 잘 알겠다’, ‘잘 되겠지요’ 정도로 답해 크게 호응하지 않았다고 봤다. 단지 사적인 친분관계에서 의례적으로 나온 공감 표시일 뿐 재판 개입의 의도는 없었다는 것이다. 임 전 차장의 직접 보고에 대해서도 양 전 대법원장이 ‘외교부가 의견서를 내기는 한대?’라고 말해 의문을 표했을 뿐이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강제징용 사건 판결을 번복하기 위해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보고받고 승인했다는 검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재판부는 강제징용 사건과 관련해서는 직권남용도, 공모도 없었다며 양 전 대법원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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