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가해 못 막는 ‘구멍 난 법’
일러스트=양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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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활동 중인 A씨는 자신을 스토킹한 혐의로 구속 수감돼 있는 B씨가 끊임없이 보내오는 편지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A씨는 B씨와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인데 장기간 스토킹을 당했다. 몇 년 전 A씨가 유튜브와 팟캐스트에 출연했는데 이를 B씨가 접한 뒤 스토킹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 B씨는 수감된 뒤에는 A씨에게 편지를 보내는 방식으로 스토킹을 해왔다. 이 중에는 속옷만 입은 여성을 B씨가 직접 그려 넣은 편지도 있다고 한다. A씨는 “스토킹 가해자가 구속 수감된 상태에서도 ‘편지 스토킹’을 계속하고 있지만 이를 막을 법적 장치가 없다고 하니 기막히다”며 “2차, 3차 가해가 없도록 제도를 개선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12일 본지가 법원 판결문 등을 분석한 결과, A씨 사례처럼 스토킹 가해자가 적발된 뒤에도 편지를 보내 추가 가해를 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C씨는 직장 동료를 스토킹한 혐의로 지난 2021년 구속돼 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 피해자 어머니의 주소로 “구치소가 아니라 정신병원 같아 너무 힘들어”라는 내용의 편지를 우편으로 보냈다. 일주일 뒤에는 “이사 간 집 방범이 잘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스토킹으로 구속돼) 희생하면서 (경찰이 피해자 보호용) 스마트워치를 준 것 같아 안심이 된다”는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또 D씨는 여자 친구를 스토킹했다가 지난 2022년 구속됐지만 구치소에서 “사랑해. 미안하다. 합의해 줘”라는 내용을 편지를 두 차례 보냈다. 2주일쯤이 지난 뒤에는 “왜 답장을 안 하냐. 합의를 못 하고 있지 않느냐”는 취지의 편지를 다섯 차례 더 보낸 것으로 조사됐다.
문제는 이런 편지들이 피해자와 가족에게 불안감이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구속된 가해자가 편지를 발송하지 못하도록 막을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은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이 외부로 보내는 편지를 원칙적으로 검열 없이 발송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수신인을 확인할 수 없는 편지, 시설 안전을 해칠 우려가 있는 편지 등만 검열하게 돼 있다.
그래픽=양진경 |
검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스토킹 가해자가 수감된 상태에서 ‘편지 스토킹’을 계속해도 피해자는 이를 추가 고소해 처벌받게 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면서 “피해자가 편지 수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밝히면 구치소·교도소가 편지를 내보내지 않게 하는 방향으로 법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교도소나 구치소에 수감된 가해자가 보낸 편지에 대해 피해자‧유족이 수신을 거부할 경우 편지 발송을 제한하는 법안이 작년 6월 발의됐지만, 지금까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또 다른 변호사는 “수감된 마약 사범 등이 보내는 편지를 검열할 수 있다는 시행령 조항이 있는데, 이를 스토킹 사범에게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한편 스토킹 범죄에 대한 경찰·검찰 수사 과정에서도 ‘편지 스토킹’에 의한 추가 가해를 막을 법적 장치가 없는 상황이다. ‘스토킹 처벌법’에 따르면, 스토킹 신고를 받은 경찰은 가해자를 상대로 ‘긴급 응급 조치’를 취할 수 있다. 100m 이내 접근 금지와 전기 통신을 이용한 접근 금지만 가능하다. 전화, 이메일을 통한 스토킹은 금지할 수 있지만 편지를 이용한 스토킹은 막지 못하게 돼 있는 것이다. 또 검찰이 할 수 있는 ‘잠정 조치’에는 가해자에 대한 서면 경고, 유치장 수용과 전자 발찌 착용이 추가돼 있지만 역시 편지를 통한 스토킹은 금지 대상에서 빠져 있다.
판사 출신인 한 변호사는 “스토킹 피해자 보호를 강화한다며 작년 7월 ‘스토킹 피해자 보호법’이 제정·시행됐지만 ‘편지 스토킹’에 의한 추가 가해를 막을 수 없는 ‘구멍난 법’이 돼 있다”면서 “스토킹 피해자 보호를 위해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말했다.
[허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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