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능유적본부, 능행 목적·의미 등 연구 성과 담은 보고서 펴내
시기 따라 행차 구성·규모 변화…'국왕의 정통성' 확인 의미도
정조의 현륭원 행차 그림 (華城陵幸圖·화성능행도) |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11일 배릉제(拜陵祭) 뒤에 능에 오를 것이니 제반일을 미리 준비하라." (인종실록 1545년 3월 9일 기사)
조선시대 국왕은 종종 궁궐이나 도성 밖으로 나갔다.
왕이 행차하는 날에는 도성의 공식 업무도 잠시 멈췄고, 왕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많은 사람이 몰렸다. 그야말로 국가적 행사였다.
그중에서 선대 왕이나 왕비의 능에 제사를 지내거나 참배하기 위해 왕이 행차하는 능행(陵幸)은 왕조의 정통성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컸다.
정조의 현륭원 행차 그림 부분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조선시대 국왕의 능행 목적과 의미, 실체 등을 규명하기 위해 진행한 연구 성과를 담은 보고서를 펴냈다고 9일 밝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이 건국된 1392년부터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재위 1907∼1910)이 사망한 1926년까지 535년 동안 총 940회의 능행이 이뤄졌다. 한 해 평균 1.76회 왕릉으로 향한 것이다.
강제훈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연구팀은 보고서에서 "조선 왕릉은 살아있는 사람이 의례를 행하는 공간을 죽은 자의 공간 못지않게 크고 중요하게 조성했다"며 공간적 의미를 짚었다.
1777년(정조 1) 능행로(출궁) 지도화 예시 |
조선 후기에는 별도 사당에서 지내던 제사를 왕릉에서 지내고, 왕이 직접 행하는 의례 절차를 확대하는 등 능행이 왕조의 정통성을 확인하는 행사라는 점도 강조됐다.
보고서는 능행 행차 구성과 규모가 시기적으로 변화하는 모습도 밝혀냈다.
조선 초에는 시위 병력과 의장, 문무백관 등을 포함해 약 4천500명 내외로 행렬이 구성됐으나 이후에는 대략 2천900∼4천명, 많으면 6천400명까지 다양하게 구성된 것으로 조사됐다.
연구팀은 "연산군 대부터 현종 대까지인 1494∼1674년에는 능행이 백성에게 부담이 된다는 인식과 더불어 전후 회복을 위해 능행 횟수가 급격히 감소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경기 구리 동구릉, 고양 서오릉 등과 같은 왕릉군은 무덤이 늘면서 왕릉 구성도 달라지는데, 이에 따라 능행 양상이 변화하는 내용을 분석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1777년(정조 1) 능행로(환궁) 지도화 예시 |
연구팀은 능행에서 곡을 연주하던 악대도 주목했다.
조선 초기에는 임금이 타던 가마 앞에 악대가 있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임금의 군사보좌관으로 활약하던 선전관이 근무하던 관청 소속 악대가 앞뒤로 배치된 것으로 파악됐다.
보고서에는 조선시대 왕의 능행 경로를 추론하고, 조선시대 도로망을 바탕으로 한 지리정보시스템(GIS) 프로그램을 활용해 왕릉을 오가는 경로를 표시한 지도 등도 담겼다.
궁능유적본부 관계자는 "연구 성과는 조선왕릉길 여행 프로그램의 경로를 기획하거나 향후 왕릉 내 역사문화관 전시를 개편할 때 활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보고서는 문화재청과 궁능유적본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연구 보고서 표지 |
yes@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네이버 연합뉴스 채널 구독하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