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밍 이후의 세계
데이드 헤이스·돈 흐미엘레프스키 지음|이정민 옮김|알키|516쪽|2만5000원
페이지마다 이름들이 가득하다. 448쪽 한 페이지에만 드라마·시트콤 작품명 8개와 제작자를 비롯한 인명 7개, 미디어 기업 이름 3개가 나온다. 66쪽에는 사람 9명의 이름과 TV 프로그램 이름 3개가 실려 있다. 목차 앞에는 소설책처럼 ‘등장인물’을 기업별로 정리했다.
난삽하지만 구체적이다. 또한 끝없는 이름의 행렬은 곧 스트리밍 산업의 실체이기도 하다. 기업과 경영자, 투자자, 제작자, 배우, 이들이 만드는 콘텐츠와 서비스가 거미줄처럼 얽힌 세계. 미국 뉴욕타임스(헤이스)와 LA타임스(흐미엘레프스키) 기자 출신인 두 저자가 스트리밍이 사람들의 일상을 잠식하고 콘텐츠 폭식의 시대를 연 과정을 파헤쳤다. 원제는 Binge Times. ‘몰아보기의 시대’라는 의미다.
◇손쉽게 콘텐츠를 폭식하는 시대
시작은 넷플릭스였다. DVD 우편 대여업으로 출발한 넷플릭스는 시청자의 기호를 정확하게 읽었다. 가령 2014년 영화 자체 제작으로 눈을 돌리면서 주목한 파트너는 애덤 샌들러였다. 흥행 성적은 괜찮았지만 평단은 혹평했던 코미디 배우다. “사람들은 고급 프랑스 요리만 찾지 않는다. 육즙 가득한 치즈버거가 당길 때도 있는 법이다.” 샌들러는 ‘언컷 젬스’ 같은 흥행작을 선보였고 이는 코언 형제나 데이비드 핀처 같은 명감독들이 넷플릭스 영화를 만드는 발판이 됐다.
초창기 넷플릭스가 ‘무엇을’ 보여줄 것인지만큼 ‘어떻게’ 보여줄 것인지를 고민했다는 분석도 돋보인다.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13편을 한꺼번에 공개해 몰아보기의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중간 광고로 흐름을 끊지 않고 오프닝 음악을 건너뛸 수 있게 해주는 등 시청 편의를 극대화한 디테일 하나하나가 혁신이었다는 것이다.
미디어 산업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디즈니는 마블·스타워즈·픽사를 아우르는 콘텐츠를, 애플은 아이폰을 비롯한 하드웨어 생태계를 무기로 참전했다. 아마존도 무료로 ‘이틀 배송’을 해주는 프라임 멤버십에 동영상을 묶어 급격히 사용자를 늘렸다. 방송·영화 시장의 강자인 NBC유니버설과 워너브러더스디스커버리도 뛰어들었다. 2019년 기준으로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가 미국에만 271개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 경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피콕, HBO맥스, 훌루 같은 후발 업체들은 ‘광고 있는 스트리밍’ 시장을 창출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광고 도입도 이 책이 미국에서 출간되던 지난해 4월엔 기정 사실이었지만 지금은 사실이 됐다. 한국에선 넷플릭스가 최근 계정 공유를 제한했고 광고 없는 기본 요금제의 신규 판매를 중단했다. 디즈니·티빙 등도 요금을 올리면서 스트림플레이션(구독료 인상)이 현실화하고 있다.
앞으로 스트리밍 시장이 광고 유무로 양분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한다. 음식이나 라이프스타일, 작전 타임이나 휴식 시간에 경기 흐름이 중단되는 스포츠 등을 광고에 적합한 콘텐츠로 언급했다. 내용에 따라 콘텐츠를 제공하고 시청하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엔 위기이자 기회
스트리밍 시장은 실리콘밸리가 할리우드를 침공하면서 형성된 것이다. 저자들은 “넷플릭스 같은 침입자가 홈 그라운드에서 싸우는 할리우드를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은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넷플릭스가 영원한 승자라는 보장도 없다. 가령 디즈니는 스트리밍 이용자 규모 5년 치 목표를 출시 첫해에 달성하며 추격해 오고 있다. ‘스타워즈’를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사 콘텐츠를 거둬들이며 방벽을 치고 있다.
“빛나는 새 콘텐츠만이 신규 가입을 유도한다.” 넷플릭스는 오리지널(자체 제작) 작품을 강화하면서 맞서고 있다. 이를 위해 유명 제작자와 배우를 영입하는 데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는다. 여러 나라 언어로 된 현지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도 전 세계 시장에서 이용자를 확보하는 전략이다. 디즈니나 애플도 한국을 포함한 다국어 콘텐츠를 만들고 방영하지만 아직 ‘오징어 게임’ 같은 세계적 히트작은 나오지 않고 있다.
저자들은 ‘오징어 게임’을 “스트리밍의 미래”로 제시한다. “언어의 장벽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허물었다. 미국 작품을 수출하는 할리우드 제국주의의 시대는 이제 완전히 끝난 것처럼 보인다.” K콘텐츠의 선전이라는 측면에서 기분 좋은 평가지만 냉정해질 필요도 있다. 스트리밍 덕에 평등해진 시장에서 한국 콘텐츠 산업은 더 치열하고 다각적인 경쟁에 직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민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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