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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김포 서울 편입' 추진 논란

조선총독부, 서울 빈민 '송충이' 취급하며 '메가 경성' 확대 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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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를 위한 '현대문으로 읽는 근대뉴스' 해설]

조선총독부 만도 못한 '메가 서울' 구상

도쿄 닮은 식민 수도 건설 목표로 1920~40년대까지 진행

1921년 12월 25일

경성 도시계획연구회에서 지난 22일 위원회를 개최하고 도시계획에 대한 제도와 기타 연구계획 사항을 협의결정한 바 이를 곧 총독부에 제안하기로 했다.

…도시계획 사업 집행에 대해서는 도시계획사업이 국가사업인 국비로 집행할지며…부(府)의 재원에 관해서는 현재 부의 구역 내는 물론 장래 도시계획 구역에 편입될 지역에 있는 관유 재산을 부에 무상 교부하며…(생략)

1922년 5월 2일

경성부 도시계획연구회에서는 지난 1일 오후 1시 경성상업회의소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부청(府廳) 신축 및 기타 안건에 대하여 협의하였더라.

1939년 4월 21일

경성부, 경성상공회의소, 경성도시계획연구회의 공동 주최로 도시계획의 권위자 이시가와 씨를 초빙하야 다음과 같이 도시계획 강연회를 개최한다 하며 4월 23일부터 5일 간은 삼월백화점 5층에서 도시계획 전람회를 개최한다고 한다. (출전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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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 인사동과 전통 한옥. 가운데 교회는 지금의 승동교회 예배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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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설

1920년대 들어 조선총독부는 경성시가 확장계획을 수립하고 ‘1기 5개년 사업’ 구상을 발표했다. 그 요지는 경성부(서울)에 사는 일본인 이주자들이 조직한 ‘도시계획연구회’의 주장을 이유로 식민지 수도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동쪽으로는 지금의 청량리에서 서쪽으로 영등포까지 경성시가지계획안을 반영시켜 식민 권력이 의도한 새로운 공간적 위계 질서를 형성하고자 했다. 이때 재경성 일본인 유산층은 남산전원도시를 꿈꾸며 장충동 청구동 신당동 등 남산 산록의 배산 임수를 원했다.

이러한 도시 확장은 철저히 재경성 유산층을 위한 것이었고, 식민 권력 강화가 목적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 삼각지~신당동 구간 4.9㎞의 도로를 부설하면서 제1기 5개년 사업을 본격화했다.

도시 확장은 경성의 도시 빈민을 몰아내는 작업이기도 했다. 경성부와 총독부는 1920년대부터 토막민(도시 빈민)의 불법 주거물 철거를 위해 추방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토막민에 대해 일제는 ‘도시 토지의 불법 점유자’ ‘도시 미관을 해치는 송충이’라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현 서울의 탄생은 바로 이와 같이 도쿄를 닮은 식민 도시의 이식 과정이었고, 경성부에 사는 이주 일본인을 위한 도시 계획이었다.

이 과정에서 1930년대 조선 동아 등의 언론은 “이제 대경성도 실현됐는데 풍치상 안 좋은 토막을 그대로 둘 수 없다” “(돈암동 등은) 앞으로 주택지로 개발될 곳인데 토막을 방치해 두면 지가상 문제가 생긴다”며 총독부를 옹호했다.

서울 확장과 함께 조선 빈민에 대한 철거와 저항이 이어졌고 결국 도시 빈민은 선전선동에 밀려 주거지를 잃는다.

한데 이러한 일제강점기의 도시 계획조차도 비록 관변 단체이긴 하지만 시민으로부터 발의 받아 모양새를 갖추려 했다. 1920년 초 발의 되어 1945년 광복으로 일제가 쫓겨날 때까지 서울은 일제의 의도대로 그들 이익을 위한 장기 안목으로 개발된다.

하지만 최근 불쑥 튀어나온 ‘서울시 김포구’라는 정치적 서울 편입 추진과 이를 노림수로 한 ‘메가 서울’ 구상은 조선총독부 구상 만도 못한 ‘아니면 말고 식’ 말장난 같다.

전정희 편집위원 laka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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