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만난 멜로니 가족 |
(로마=연합뉴스) 신창용 특파원 =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는 취임 1주년을 앞둔 지난달 20일(현지시간) 사실혼 관계인 안드레와 잠브루노와 헤어진다고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직접 밝혔다.
멜로니는 "거의 10년 동안 지속된 관계는 여기서 끝낸다"며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진심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가슴속에 맺힌 말이 있었다.
멜로니는 이후 추가로 글을 올려 "내 사생활을 공격해 나를 흔들려는 사람들이 있다"며 "물방울이 아무리 돌을 깎아내려고 해도 돌은 돌일 뿐이고, 물방울은 물일 뿐"이라고 썼다.
7살 딸의 아버지인 잠브루노와의 관계가 파국을 맞은 데에는 그 배후에 자신을 흠집 내려는 세력의 사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탈리아 미디어 그룹 메디아세트의 시사 풍자 프로그램 '스트리시아 라 노티치아'는 지난달 17일과 19일, 두 번에 걸쳐 잠브루노의 음담패설 동영상과 음성 녹음을 공개했다.
첫 방송에선 잠브루노가 메디아세트 산하 '레테 4' 방송의 뉴스쇼 '오늘의 일기'를 진행하면서 동료 여성 앵커에게 "왜 나는 당신 같이 똑똑한 여성을 더 일찍 만나지 못했을까"라며 지분거리는 모습이 담겼다.
두 번째 방송은 훨씬 수위가 높았다. 잠브루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녹음된 이 방송에서 그는 사내 불륜을 과시한 뒤 누군가에게 단체 성관계에 참여하면 자신과 함께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를 주장해온 멜로니에게는 치명타였다. 그는 SNS에 화목해 보이는 가족 셋의 사진을 올린 뒤 그런 행복했던 시간과 딸을 갖게 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는 결별을 선언했다.
현지 언론매체에서는 고(故)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가문이 운영하는 메디아세트에서 멜로니 총리 동거남의 비행을 폭로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가문은 방송 내용을 사전에 알지 못했으며, 관여한 바 없다고 주장했지만, 의혹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음모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장녀인 마리나와 베를루스코니가 설립한 정당 전진이탈리아(FI)를 배후로 지목한다.
베를루스코니 가문의 지주회사 핀인베스트의 회장인 마리나는 지난 9월 멜로니 총리가 주도한 은행 횡재세 법안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마리나는 "여러 가지 의심과 비판에 노출될 수 있는 조치"라고 성토했다. 마리나가 평소 언론 노출을 극도로 자제해왔기에 이례적인 공격이라는 평가가 많았다.
은행 횡재세 법안은 고금리로 막대한 추가 이익을 거둔 은행들에 40%의 세율로 일회성 세금을 물리는 방안이다. 핀인베스트는 은행 방카 메디올라늄 지분 30%를 보유하고 있다.
이에 마리나가 가문이 소유한 메디아세트를 통해 멜로니 총리에게 정치적인 공격을 가함으로써 자신들의 사업적 이익을 건드리지 말라고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21일 멜로니 총리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 |
멜로니 총리와 베를루스코니 가문의 갈등설은 이전부터 제기돼왔다.
이탈리아에서 1994∼2011년 세 차례에 걸쳐 9년간 총리를 지낸 베를루스코니는 멜로니를 첫 여성 총리에 올려놓으며 '킹메이커' 역할을 했지만 둘은 내각 구성을 둘러싸고 충돌했다.
멜로니 총리는 내각 요직에서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FI 측 인사들을 배제했다.
연립 정부 탄생에 FI의 지분이 가장 적어서였지만 베를루스코니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내각 구성을 둘러싸고 갈등이 고조되던 시기에 상원 의사당에서 마치 사진기자들이 보란 듯이 메모를 작성했다.
카메라에 포착된 메모에는 "조르자 멜로니, 그녀의 행동 1. 고압적 2. 지배적 3. 오만 4. 공격적", "바뀌려는 의지가 없다. 그녀는 잘 지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적혀 있었다.
베를루스코니가 지난 6월 별세한 이후에도 베를루스코니 가문은 FI의 후원자로서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다섯 자녀는 부친이 보증했던 FI의 채무 9천만유로(약 1천278억원)를 갚는 데 동의했다.
FI는 마리나의 발언 이후 곧바로 정부의 은행 횡재세 법안을 무력화할 수 있는 수정안을 발의했다.
각종 음모론에 맞서 베를루스코니 가문을 가장 먼저 엄호한 것도 FI의 새 대표인 안토니오 타야니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었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베를루스코니 가문은 멜로니 정부에 피해를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며 "베를루스코니 가문은 해당 보도와 무관하다. 해당 프로그램 책임자가 독립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건의 배후에 정치적인 음모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는 데에는 그만큼 이탈리아 정계에 정책 대신 정략이, 경쟁 대신 암투가 판을 치기 때문일 수 있다. 권력 다툼이 치열한 이탈리아에선 내각의 평균 수명이 1년 2개월에 불과하다.
또한 정치, 미디어, 비즈니스가 이탈리아에서 얼마나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멜로니 총리는 일단 충돌을 피하고 한발 물러섰다. 그는 지난달 27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열리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취재진과 만나 "FI, 메디아세트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현재 의회에는 내년도 예산안이 상정돼 있다. 멜로니 총리는 상·하원에서 3분의 2 지지가 필요한 총리 직선제 개헌도 추진하고 있다. 멜로니 총리 입장에선 FI가 미워도 손을 잡아야 하는 상황이다.
changy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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