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달러 사이에 놓인 아르헨티나 페소화 지폐 |
(멕시코시티=연합뉴스) 이재림 특파원 = 100% 넘는 연간 물가상승률로 신음하는 남미 아르헨티나에서 최근 소셜미디어를 한동안 달군 영상이 있다.
시중에 유통되는 동전을 망치로 때려 테두리 부분만 따로 떼어내는 모습을 담은 건데, 이렇게 모은 '동전 테두리'를 고철처럼 내다 팔면 원래 동전 액면가보다 3∼4배 더 높은 금액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걸 녹이면 구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화폐 훼손에 따른 처벌까지 감수했을 만한 이 상황은 아르헨티나 법정통화인 페소(peso)의 가치 폭락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현재 아르헨티나에서 페소화는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만큼이나 앞날을 알 수 없다.
2주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1차)에서 유력 후보로 떠오른 하비에르 밀레이(52)가 "미국 달러로 페소화를 대체하자"는 공약을 내걸고 있어서다. 이른바 '달러화'(Dollarization)다.
미국 달러와 밀레이 얼굴을 합성한 지폐 모양 종이를 들고 있는 아르헨티나 시민 |
백척간두의 시간을 보내는 아르헨티나 페소화에는 사실 이미 파란만장한 역사가 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과 경제부 홈페이지 자료 등을 종합하면 법적으로 페소라는 공식 명칭을 붙여쓰기 시작한 건 1881년 11월이다. 그전에는 다양한 통화 유형이 있었다고 한다.
통일된 화폐 단위인 페소의 정확한 명칭은 '페소 모네다 나시오날'(ARM)이다.
이 통화는 1969년 12월까지 쓰이다가 1970년 1월 '페소 레이'(ARY)로 대체됐다. 물가 상승으로 물건값을 표기할 때 '0'이 너무 많이 붙게 되면서, 100대 1의 비율로 ARM을 ARY로 대체하는 리디노미네이션 성격이 강했다.
이후 1976∼1983년 이른바 '더러운 전쟁'이라고 불리는 군사 정권 시기를 거친 뒤 1983년 6월 '페소 아르헨티노'(ARP)로 다시 화폐 개혁을 했다. 이때 기존 ARY는 1만대 1의 비율로 교체됐다.
하지만,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한때 600%대에 이르는 급격한 인플레이션으로 휘청였고, 정부는 2년 만인 1985년 6월 '아우스트랄'(ARA·남쪽이라는 뜻을 지님)이라는 완전히 다른 이름으로 화폐 개혁을 단행했다. ARP와의 교환 비율은 1천대 1이다.
지난달 11일(현지시간) 1천 페소 뭉치 들고 물건 사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민 |
화폐를 변경해가며 물건값의 '0'을 지워보려는 아르헨티나 당국의 노력은 연신 허사였다. 물가는 계속 천정부지로 뛰었고, 1990년 전후로는 연간 물가상승률 3천% 넘는 '초인플레이션'을 경험하기까지 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결국 또다시 법정 통화에 손을 댔고, 1992년 1월 1만 아우스트랄을 1페소(ARS)로 정하는 규정을 통과시켰다. 이 페소가 현재까지 통용되는 통화다.
아우스트랄을 버릴 즈음 금융당국은 환율 불확실성을 없앤다는 이유로 '1달러=1페소'로 고정하는 페그제도 도입했지만, 외환 시장 변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2002년 정책을 폐기했다. 페그는 '못' 또는 '말뚝'이라는 뜻이다.
페소는 스페인어로 직역하면 '무게'를 뜻하는 단어다.
주민들 입장에선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가 된 아르헨티나 페소는 이번엔 아예 국제 기축통화인 달러에 자리를 내줄 수도 있는 운명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됐다.
walde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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