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선거운동 당시 행인과 '설전'…럭비 월드컵 개막식서 야유 세례
국민이 뽑은 대통령에게 거침없이 할 말 하는 프랑스 사회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파리=연합뉴스) 송진원 특파원 = "어쩌고저쩌고", "수다쟁이", "무능한 대통령"
지난달 25일 아침,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의 사이트에서 가장 눈에 띈 기사 제목이다. 모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을 겨냥한 수식어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 전날(24일) 저녁 8시 현지 TF1, 프랑스2 TV 인터뷰에서 이민, 생태적 전환, 인플레이션, 니제르와의 갈등 등 각종 현안에 대해 30분가량 발언했다.
피가로 기사는 그에 대한 야당들의 반응을 소개한 것이었다.
중도 성향의 마크롱 대통령을 비판하는 데엔 좌우가 따로 없다.
우파 공화당(LR)의 하원 대표인 올리비에 말렉스 의원은 소셜미디어 엑스(X·옛 트위터)에 마크롱 대통령을 두고 '입방아', 즉 "수다쟁이"라고 비판했다. 말렉스 의원은 "전기를 못 만드는 게 안타깝다"라고 한 번 더 비꼬았다.
극좌 성향의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측에선 "무능력한 대통령", "헛소리 챔피언"이란 반응이 나왔고, 녹색당의 한 의원은 "어쩌고저쩌고(Bla. BLa. Bla)" 라고 조롱했다. 알맹이 없이 말만 많다는 뜻이다. 대통령 비판에 거침이 없다.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날 것 그대로'의 반응은 정치인에게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지난해 4월 재선에 도전한 마크롱 대통령이 막판 선거운동을 위해 알자스 지방을 찾았을 때다.
한 행인과 마크롱 대통령 사이에 병원 지원 문제를 두고 '각본 없는' 설전이 벌어졌다.
이 행인은 먼저 마크롱 대통령에게 "당신 때문에 살면서 처음으로 마린 르펜(당시 극우 정당 대선 후보)에게 투표할 것"이라고 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유가 뭐냐"고 묻자 그는 "당신이 임기 동안 해 온 일을 보면, 당신은 오만하고, 건방지고, 냉소적이며, 마키아벨리적이고 거짓말쟁이다. 당신은 병원을 죽였다"라고 퍼부었다.
"당신 제정신이냐"고 말하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이 행인은 더 나아가 "5공화국 대통령 중에서 당신만큼 형편없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고 독설을 했다.
마크롱 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그는 "많은 토론 거리를 제기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한 뒤 곧바로 "민주주의에서는 토론을 할 수 있지만, 만약 당신이 당신 생각만 있고, 토론할 준비가 안 돼 있다면 우린 토론할 수 없다"고 받아쳤다.
그러면서 "당신은 매우 공격적인 발언을 했지만, 저는 당신을 존중한다"는 말로 상대방의 태도 문제를 지적했다.
이날 두 사람의 모습은 뉴스로 다뤄졌고, 소셜미디어에서도 뜨거운 반응이 일었다.
"행인이 맞는 말을 했다", "대통령에게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한다"는 등 평가는 제각각이었다.
(AFP 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지난달 8일(현지시간)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개막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
마크롱 대통령이 공개 석상에서 난처한 상황에 부닥친 일은 또 있다.
지난달 8일 프랑스 파리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개막식 날, 마크롱 대통령이 개막 연설을 하러 모습을 드러내자 수만 관중이 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마크롱 대통령은 "럭비 친구들"이란 말로 겨우 연설을 시작했지만 야유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준비해 온 말을 멋쩍게 이어갔고, 이 장면은 개막식 생중계를 통해 고스란히 방영됐다.
지난해 재선에 성공한 마크롱 대통령은 연금 개혁을 밀어붙이다 지지율을 다 깎아 먹었다. 여론조사기관 입소스에 따르면 대선 직전인 지난해 3월 마크롱 대통령의 지지율은 47%까지 올라갔다가 올해 4월 28%까지 곤두박질쳤다. 그날 경기장에서의 야유는 이런 여론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상황들을 볼 때마다 떠오른 질문은 "한국이었다면?"이다.
보수든 진보든 정권의 성향을 떠나 한국에서 대통령을 향해 야당 정치인이 "수다쟁이, 헛소리 챔피언"이라고 했다면 당장 여당에서 들고 일어나지 않았을까.
대통령에게 행인이 대놓고 "형편없는 대통령, 거짓말쟁이"라고 했다면 극성 지지자들이 '무례, 불경' 운운하며 신상 털기, 좌표 찍기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전 세계에 생중계로 방송되는 대규모 국가 이벤트에서 관중들이 대통령을 향해 경기장이 떠나가라 야유를 퍼부으면 "국격을 땅에 떨어뜨렸다"는 말들이 난무했을 테다.
프랑스의 민주주의가 100% 완벽하진 않다. 이상적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감히'라는 수식어 없이 국민이 직접 손으로 뽑은 대통령에게 어떤 의사든 표현할 수 있는 프랑스 사회, 그 자유로운 분위기가 부러운 건 사실이다.
s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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