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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추석에 혼자 있는 그대에게, 영화 ‘책 종이 가위’

조선일보 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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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 어때]추석에 혼자 있는 그대에게, 영화 ‘책 종이 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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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문화부 신정선 기자입니다. ‘그 영화 어때’ 8번째 레터는 추석에 어쩌면 혼자 계실지도 모를 여러분을 위해 골라봤습니다. 다들 모여서 영화관에 가고 여행을 가지만, 각자의 어떤 이유로 긴 연휴를 혼자서 보내고 계신다면, 사람 많은 영화관이 아니라 집에서 조용히 뭘 볼까 채널을 돌리고 계신다면, 이 영화 ‘책 종이 가위’를 추천해드립니다.

아마 이 영화 처음 들어보는 분들이 많으실 거에요. 우선 영화 포스터를 한 번 보실까요.

영화 '책 종이 가위' 포스터. 일본 책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뒷모습이다.

영화 '책 종이 가위' 포스터. 일본 책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의 뒷모습이다.


포스터를 보는 순간 생각했습니다. ‘어머, 이건 봐야 해!’

저 뒷모습, 말없는 초대장 같지 않나요. 뒷모습의 주인공은 일본의 책 디자이너 기쿠치 노부요시(菊地信義, 1943~2022)입니다. 이 분이 책 만드는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책 종이 가위’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운영하는 제작사 분복(分福)에서 만들었어요. 고레에다 감독의 ‘괴물’(올해 칸 영화제 각본상), ‘브로커’(작년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송강호) 등이 분복 작품이죠. 감독은 분복 소속인 히로세 나나코인데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제작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저도 이 분 작품은 처음인데 분복의 색깔이 이 다큐에서도 보이는 것 같았어요.

‘다큐멘터리? 게다가 책? 이거 엄청 졸리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전혀 지루하지 않아서 저도 약간 놀랐습니다. 어떤 ‘예술영화’는 감독의 자뻑용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는데(아니 왜 제 돈으로 님의 예술을) 제작사의 작품 철학이 있어선지 타협하지 않는 고고함이 배어있습니다. 일본이라는 단어와 장인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어쩐지 안 봐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드실 수 있습니다. 계속 그거 하나 한다는 얘기 아냐? 그런 거야 많이 나오지 않았나? 이런 생각. 근데 이 분은 좀 달라요.

기쿠치 노부요시는 1만5000권 책 표지를 만들었는데, 오직 종이와 가위만 갖고 디자인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 제목이 ‘책 종이 가위’입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당연히 안 썼고요. 어떤 작품인지 대략적으로 아실 수 있게 하나 보여드릴게요.


기쿠치 노부요시가 디자인한 책 '옷자락 꽃(裾花)'. 마이코 스기모토(杉本真維子)가 저자다.

기쿠치 노부요시가 디자인한 책 '옷자락 꽃(裾花)'. 마이코 스기모토(杉本真維子)가 저자다.


느낌 오시죠. 이 분에게 책은 책이 아닙니다. 몸이죠. 소설책이면 소설의 몸이 책이 되는 거고, 시집이면 시의 몸이 책입니다. 그 몸을 디자인하는 것이니 어찌 쉽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맨손으로 종이를 하나씩 쓰다듬어서 질감을 확인하고, 그 많은 폰트를 크기별 색상별 채도와 명도별로 일일이 구현해보면서 고민합니다. 명조체를 좋아하시는데, 영화에 “고딕체는 무기적이다, 온도가 없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네, 폰트에서도 온도를 느낄 정도가 돼야 책 디자인이 나오나 봅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책 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일하는 마음, 내가 만드는 것, 내가 만나는 사람, 그들 앞에 끝까지 투명하도록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 책을 만들든 신문을 만들든 아니면 가방을 만들든 호떡을 만들든. 누구나 필요한 거죠. 직접 만든 책이 동네 서점 서가에 꽂혀있는 걸 보고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1만5000권을 만드셨는데도 그 느낌이 여전하신듯, 새 책을 꺼내들며 “너무 행복해서 쑥스럽다”고 하시는 모습에선 소년 같은 설레임이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13일날 개봉했는데, 벌써 VOD에 올라와있습니다. 요즘 예술영화들이 영화관에서 2주를 못 버티네요. 제가 레터를 통해서라도 부지런히 더 알려드릴게요. 검색해보니 시리즈온, 웨이브, 왓챠에 올라와 있습니다.


끝으로 칠순에도 소년 같은 책 디자이너의 한 말씀.

“차려줄게. 그 단어의 한자를 좋아해. 차리다라는 말 자체가 디자인이라고 생각해. 설계가 아니라 차리는 거잖아. 누군가를 위해 하는 행위니까. 만드는 건 내가 하지만 타인 없이는 성립이 안 돼. 밥 차려줄게라는 말에 이미 타인이 있는 거지. 디자인도 타인을 위한 거야.”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레터에도 딱 맞는 말이네요. 저도 여러분을 위해 다음 레터를 ‘차려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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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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