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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통화·외환시장 이모저모

통화정책 '울타리' 벗어난 이창용의 광폭 행보[BOK워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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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금리 올릴 만큼 올린 한은

노동·탄소중립 등 거대 담론으로 눈 돌려

취임 때부터 "통화정책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

정부 정책 수립·민간 의사결정에 도움 주는 '지적 리더' 강조

일부 정책 엇박자·주택시장 등 현실 정책에선 '선택적 리더'

[이데일리 최정희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작년 4월 취임 이후 1년여간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금리를 올렸다. 물가와 환율 안정을 위해 직진한 시간이었다. 금리를 올릴 만큼 올린 이 총재는 이제 통화정책을 넘어 거시 경제 전반으로 눈을 돌리며 광폭 행보에 나서고 있다.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 기후 변화 등 거대 담론에 대해서도 한은이 주도적으로 공론화에 나서는 것이 대표적이다. 일각에선 정부의 부동산, 교육 정책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았던 박승 전 총재가 떠오른다는 말도 나온다. 이 총재의 오지랖(?)에 때 아닌 그의 부총리 영전설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다만 취임사 등 그의 과거 발언을 되짚어보면 이같은 이 총재의 행보는 이미 예견된 일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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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12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 창립 제73주년 기념사를 낭독하고 있다.(출처: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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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거시 담론을 건드리다

이 총재는 취임 후 줄곧 우리나라가 장기적으로 보면 ‘구조적 저성장’ 기조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밝혀왔다. 그러나 ‘구조적 저성장’은 단기간의 경기 진폭을 낮추는 금리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다. 그렇다면 금리 바깥의 영역에서 한은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이 총재의 답변은 명확하다.

그는 취임사에서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적 도전을 생각해 봤을 때 우리 책임이 통화정책의 테두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며 “물가안정, 금융안정 기본 책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민간 부문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지적인 리더(intellectual leader)’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은은 신축 본관으로 이사한 뒤, 각종 세미나를 통해 관련 행보를 강화하고 있다. 지난 4월 25일엔 ‘2023년 노동시장 세미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 총재는 “국내외 노동시장의 변화가 일시적인지, 구조적인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며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

최근 우리나라는 여성과 고령층의 노동 공급이 증가하면서 취업자 수가 호조세를 보이고 있지만,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노동 공급의 감소 우려는 크다. 이런 부분이 한은의 제1목표인 물가안정에 미치는 영향이 어떤지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 총재는 지난 20일에는 2050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와 함께 ‘제1회 녹색금융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했다. 탄소배출이 많은 제조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가진 우리나라의 특성상 탄소중립 과제는 기업의 수익성·재무건정성을 악화시키는 악재인 동시에 새로운 금융 리스크로 부각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총재는 이틀 뒤인 12일 창립 기념사를 통해선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한 감독원이 없다는 이유로 이 문제를 방치해선 안 된다”며, 감독기관과의 정책 공조와 제도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로 한은은 유사시 비은행에 대한 즉각적인 유동성 공급이 이뤄질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한은 안팎에서는 이같은 이 총재의 광폭 행보를 두고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라는 한은의 책무와 크게 동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구조적으로 고착화해가는 저성장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은 정부, 한은을 구분짓지 않기 때문이다.

악마는 ‘현실 정책’, 디테일에 있다

관건은 총재가 바뀐 후에도 한은이 이같은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을지 여부다. 이 총재 개인의 퍼포먼스에 그친다면, 지난 1년여간 한은의 ‘시끄러운 변화’에 큰 의미를 두기 힘들다. 한은이 정부의 정치색과 무관하게 어젠다를 계속 던질 수 있을지도 관건이다. 예컨대 소득·자산 양극화 문제의 경우 보수 정권이 들어선 뒤 흐지부지 있지만, 이 역시 ‘구조적 저성장’을 고착화시키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이 총재도 취임사에서 “지나친 양극화는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킬 것이기에 이에 대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 등 거대 담론에 대해서 목소리를 키워가고 있지만, 성장-물가-금융안정간 상충 관계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당장 눈앞에 놓인 현실 과제들에 대해선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모습이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올 하반기에는 세수 부족으로 인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이 불가피하다는 관측이 많다. 추경이 세수 부족분을 보충하는 수준이라면 큰 문제가 없지만, 내년 4월 총선을 의식해 경기 부양까지 고려한 대규모 편성이 이뤄진다면 물가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한은은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한은은 금리 인상기에 대출금리 인하 정책을 내세웠던 금융당국을 향해서도 정책 엇박자가 아니라고 항변했었다.

주택 가격은 하락세를 멈추고 거래가 늘어나면서 가계대출이 증가하는 상황인 반면, 지방에서는 미분양 주택이 쌓이고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부실 우려가 여전하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은 주택 하방 위험이 높은지, 상방 위험이 높은지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보니 어떻게 대비하는 것이 좋을 지에 대해서도 분명하지 않다. 부동산 시장은 금융안정은 물론, 물가안정과도 상관관계가 높은 데도 말이다.

작년 가계대출의 구조를 개선하겠다며 추진한 안심전환대출이 올해 특례보금자리로 통합되면서 일부에선 가계대출을 늘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도 한은은 해당 정책을 담당하는 주택금융공사의 2대 주주로서 별 반응을 내놓고 있지 않다. 가계대출 증가는 한은의 금융안정을 해치는 요인으로 꼽힌다.

대한민국의 씽크탱크를 표방하는 ‘한은호(號)’의 수장인 이 총재의 광폭 행보는 박수를 보낼 일이다. 하지만 그 행보가 ‘선택적’이라면 한은의 영역 확대에도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다. 현실 정책에서도 이 총재 말대로 ‘계급장 떼고 할 말은 하는’ 한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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