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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4 (수)

직역 갈등만 부추긴 ‘간호법’… 본회의 재투표서 폐기 [뉴스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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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野 단독입법·대통령 거부권

소통없는 정부·여야 조정 실패

상처뿐인 논쟁… 결국 원점으로

간호법 폐기 안팎·전문가 진단

간호법 내용 대부분 의료법서 차용

31개 조항 중 새로운 건 7개 조항뿐

간호사 처우 개선 등 방향제시 그쳐

그럼에도 의료인들 내부 극한 대치

“尹은 협치 밝히고 野는 실용 접근을”

낡은 법 정비·의사 수 확보 등 과제로

“국민 입장에서 부당한 입법폭주를 저지하기 위해 부결을 당론으로 정했다.”(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

“국민의 뜻을 받아 원칙대로 재투표에 임할 것이다.”(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

세계일보

재표결 지켜보는 간호사들 30일 간호사들이 국회 본회의장 방청석에 간호법 재표결을 보기 위해 모여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간호법 제정안은 이날 국회 본회의 재표결에서 부결됐다. 서상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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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 양당 원내대표가 30일 국회 본회의 직전 각 당의 간호법 제정안 재투표 방침에 대해 한 말이다. 여야 모두 한목소리로 ‘국민’을 부르짖었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지난 2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가 본회의에 직회부한 이후 4개월 가까이 의료계 직역 간 갈등을 극한까지 몰아붙였던 간호법 제정안이 결국 상처만 남긴 채 이날 본회의 재투표에서 폐기된 것이다.

정부·여야가 간호법 제정안에 대해 조금도 양보하지 않는 사이 간호사·간호대생은 거리로 나섰고 의사·간호조무사 단체는 국민 건강권을 볼모로 한 부분파업을 감행했다. 간호법 갈등이 우리 사회에 직접적 피해를 안길 정도로 첨예했지만 정부·여야는 갈등 조정에 무능력한 모습만 보였다.

이번 간호법 논쟁은 정치권에만 숙제를 남긴 게 아니다. 낡은 의료법 체계가 과거와 달라진 의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데 따라 현장에서 누적된 갈등이 간호법 제정안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대착오적인 의료체계를 손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각 직역의 업무 영역을 유연하게 하고 의사 수를 충분히 공급해 늘어날 지역사회 돌봄·의료 수요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법안을 단독으로 밀어붙였던 야당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대선 때 공약한 사안”이라고 압박하고 정부·여당은 “공식적인 정책공약집에 담긴 바 없다”고 반박하면서 간호법 논쟁은 지지부진한 진실게임 양상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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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왼쪽),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원내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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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큰 문제는 정부·여야 간 갈등 조정의 부재로 인한 사회 혼란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최근 본회의로 직회부된 방송법과 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야당의 단독 입법-대통령 거부권 행사-국회 재투표 통한 법안 폐기 수순을 밟아 간호법의 운명을 따르게 될 것이란 예상이 많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여야 모두 대화를 하고자 하면 (진영 내에서) 욕을 먹는 상황이 된 것 같다”며 “내년 총선 때까지 경색 국면이 해소되기 쉽지 않아 보인다. 이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보니깐 정치권의 대화 실종이 일종의 뉴노멀(새 기준)이 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전문가들은 제2, 제3의 간호법 사태를 막기 위해 윤 대통령에겐 “협치에 대한 의지 천명”을, 제1야당인 민주당에는 “실용적 접근”을 주문했다. 박상병 정치평론가는 “우리나라 정치의 중심은 결국 국회가 아니라 대통령”이라며 “결국 대통령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협치 의지를 밝히고 국민의힘에 야당과 협상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는 “(윤 대통령이 협치를 선언하더라도) 손바닥 하나로 박수를 칠 수 없기 때문에 야당 또한 실용주의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윤 대통령이 여야 대화·타협을 통한 협치로 정국 전환을 모색하고 민주당이 실용적 관점, 민생 우선의 관점에서 화답하는 모양새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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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에 따르면 간호법은 애초 의료법에 규정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관련 내용을 옮겨온 것이 대부분이다. 간호법은 31개 조항으로 구성돼 있다. 이 중 23개 조항을 의료법에서 그대로 가져왔다. 용어만 바뀐 걸 제외하면 새로운 건 7개 조항뿐이다. 이 또한 간호사 처우 개선을 국가의 책무로 두거나, 인권침해 금지 등 방향을 제시하는 데 그친다. 간호법에 의료기관을 넘어 ‘지역사회’가 명시됐단 걸 이유로 의사단체는 간호사의 단독 개원 가능성을 주장하지만 이는 현행법상 불가능하다.

알맹이가 없는 법에 의료계가 들썩였던 건 기존 의료법이 허술한 탓이 크다. 의료법은 의사의 업무를 ‘의료와 보건지도를 임무로 한다’, 단 한줄로 규정한다. 간호사 관련 업무는 단 4줄뿐이다. 1962년 제정된 의료법 조항 거의 그대로다. 의료현장에선 법이 규정한 업무 범위를 넘은 진료 행위가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다. 간호법 폐기에 반발한 대한간호협회가 불법적인 진료지원(PA) 행위를 거부하는 단체행동을 하게 된 배경이기도 하다.

김윤 서울대 교수(의료관리학)는 “해외에서 간호사나 임상병리사, 방사선사가 할 수 있는 걸 우린 의사만 할 수 있게 돼 있다”며 “의사들이 여러 직종의 업무를 모호하게 규정했으면서 다른 직역의 업무를 두고는 업무영역 침해라고 하는 게 반복돼 지난 60년간 바뀐 게 없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간호법에는 간호사 업무 관련 내용이 10페이지 넘게 들어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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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간호사협회 회원들이 30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간호법 제정 약속 이행을 촉구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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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병원 밖 돌봄·의료 수요가 늘어나면 간호사나 물리치료사 등의 업무가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정부도 재택 의료 사업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아직은 방문진료를 비롯한 재택 의료체계가 미비해 참여율이 높지 않다. 흔히 왕진으로 불리는 동네의원의 방문진료는 2019년 말부터 시행됐는데 이날 기준 전체 동네의원 약 3만5000곳 중 858곳(한의원 제외)만 참여하고 있다. 김 교수는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매번 의사를 불러 큰 비용의 방문치료를 받을 수는 없다”며 “지역사회에서 의사 외의 다른 직역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호사가 환자 집을 방문해 간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는 크게 병·의원의 가정간호와 장기요양센터의 방문간호로 구분된다. 이때 간호사는 의사의 지시나 처방에 따라 방문간호를 하는데 의료기관의 지시서를 받는 데 어려움이 있어 간호사의 업무를 유연하게 바꿔야 한다고 간호계는 주장한다. 전문가들도 기존 의료법 체계는 시장의 진입을 제한하는 ‘면허 제도’의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팀 단위로 방문진료·치료가 이뤄지는 지금의 상황에선 경직된 의료체계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정형선 연세대 교수(보건행정학)는 “의료법이든 간호법이든 면허 규정이 중복되는 영역을 일정한 여건하에서 허용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의사들이 모두 현장에 나갈 수는 없고, 모든 경우에 의사들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현장은 오히려 간호인력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고 설명했다.

의사 수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관건이다. 도서벽지 등 의료취약지와 필수의료 분야에 의사는 부족한데 의사단체는 의대 정원 증원과 다른 직역의 업무범위 확대 등을 모두 반대하고 있다. 소위 ‘기피과’ 의사들의 처우 개선도 중요하지만 늘어날 의료수요에 맞게 의사 수를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정 교수는 “간호사 등이 방문간호를 할 때 지시, 판단을 내리는 의사 수도 충분히 공급돼야 한다”며 “의사는 없는데 의사 배출이 늘지 않으면 고령화에 대비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1일 대한의사협회와 의대정원 확대 관련 논의를 재개한다. 정부는 의대 정원을 2000년 의약분업 사태 이후 줄어든 수(351명)만큼이나 그 이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본다.

김승환·최우석·이정한·이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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