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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0 (금)

“이번엔 떨어트려 봐”…그러자 필리핀 타자들의 배트가 허공을 갈랐다 [BFA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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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여자야구 국가대표 허일상 배터리 코치. 람틴(홍콩) | 황혜정기자.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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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 람틴(홍콩)=황혜정기자] “이번엔 떨어트려 봐.”

그의 사인을 접수한 포수가 투수와 신호를 주고받았다. 투수는 변화구를 던져 공을 스트라이크 존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러자 상대 타자들의 배트가 여지없이 허공을 갈랐다.

“이번엔 바깥쪽으로 하나 던져봐.” 이번에도 배트가 끌려나왔다. 그렇게 삼진을 잡았다.

우연이었을까. “민성아, 몸 쪽 변화구 던지면 네 공 아무도 못 쳐. 다 파울난다고. 그거 또 던지자.” 그러자 투수 박민성이 몸 쪽으로 예리한 슬라이더를 꽂아넣었고 여지없이 파울 타구가 났다.

경기 시작부터 끝까지 2시간 40분 동안 투수들이 던진 단 하나의 공도 그의 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역시도 경기 내내 모든 공에 사인을 낸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절실했다.

그토록 바라던 승리를 쟁취하자 모두가 그라운드로 뛰쳐나갔다. 그때 그는 조용히 더그아웃을 나와 경기장 밖으로 나갔다. 행여나 선수들을 마주칠까 봐였다. 눈에는 이미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여자야구 국가대표 배터리 코치 허일상(44)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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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야구 국가대표 허일상 배터리 코치가 외야수 양서진과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있다. 람틴(홍콩) | 황혜정기자.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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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한국시간) 필리핀과 2023년 아시안컵(BFA)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전 허 코치는 “프로야구 선수 은퇴 후 10년 만에 처음으로 선수 때 루틴을 오늘 가져갔다. 아침을 먹지 않았다. 나는 선수 시절 경기가 있는 날 아침을 먹지 않는다”고 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이날은 꼭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다. 이날 승리하면 대표팀은 2승1패를 기록해 조 1위 일본에 이어 조 2위로 슈퍼라운드에 진출할 수 있었다. 슈퍼라운드에 진출하면 오는 8~9월 일본/캐나다에서 열리는 세계야구월드컵 출전권도 획득할 수 있다.

한 경기에 너무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제까지 대표팀이 이 목표 하나만 보고 달려왔기에 허 코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전날 상대 필리핀을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당일날 새벽에 다시 일어나 또 분석했다.

경기 후 대표팀 이동현 투수 코치는 “오늘 경기는 (허)일상이 형의 공이 정말 크다. 일상이 형이 타자의 스윙이나 움직임에 대한 분석을 정말 많이 해주셨다. 투수들이 잘 던져준 것도 있지만 분석을 토대로 한 전략이 정말 잘 들어맞았다”고 했다.

허일상 코치는 “필리핀 타자들이 소프트볼을 해왔었기 때문에 위에서 찍어치거나 오른손을 많이 쓰더라. 그래서 당겨치는 타구가 많이 나온다. (박)민성이의 공이 무브먼트가 좋기 때문에 몸쪽으로만 승부하면 파울 타구가 나와 카운트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오늘 경기 끝날 때까지 그쪽으로만 승부한 것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담담히 말했다.

프로야구 출신 은퇴 선수들이 대표팀 코치로 부임하자 여자야구 대표팀도 ‘작전 야구’를 구사할 수 있게 됐다. 포수 부분에 있어서는 전(前) 롯데·SK 포수였던 허일상은 대표팀 배터리 코치로 부임해 대표팀 포수들의 질적 성장을 이뤄냈다. 블로킹 방법, 송구 방법을 다시 정립했고, 프로야구에서 쓰는 볼배합과 사인을 알려주며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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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국가대표 포수 이빛나(가운데)가 필리핀전 승리 후 세계야구월드컵 진출권을 획득하자 눈물을 흘리고 있다. 람틴(홍콩) | 황혜정기자.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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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정말 행복해요. 선수들에게 너무 고맙습니다. 오늘 너무 행복해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네요.”

허 코치는 대표팀이 필리핀전에서 9-5로 승리하고 세계대회 진출권을 따내자 펑펑 운 이유로 ‘너무 행복해서’라고 답했다. 그는 “여자야구 선수들은 돈을 받고 운동하는 친구들이 아니잖나. 좋아해서 야구를 하고 국가대표도 되는 거다. 그래서 더더욱 이 친구들이 야구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나도 뭐라도 해야했다”고 했다.

물심양면으로 대표팀을 지원해왔다. 2시간 넘게 차를 타고 자신의 레슨장을 찾은 선수들에 쓴소리를 해가며 쉼 없이 지도했다. “내 새끼들이 어디가서 못한다고 욕먹는 게 싫다”는 이유 하나로 여자 선수들에게도 자비없이 남자 선수들과 같은 잣대로 훈련시켰다. 몸이 아픈 선수가 있으면 직접 병원으로 데려가 프로 선수처럼 몸을 관리하는 법을 알려줬다. 주말마다 교통비와 식비 정도만 받고 대표팀을 지도했다. 여자야구 국가대표 지도자의 월급은 0원이다.

허 코치는 필리핀전 승리의 공을 선수들에 돌렸다. 그는 “투수들이 제구가 좋지 않았으면 나도 그런 사인을 내지 못했다. (박)민성이와 (이)지숙이가 정말 잘 던져줬다. 그리고 내가 싫은 소리를 해도 항상 감사하다며 열심히 훈련에 임해준 포수들인 (최)민희와 (이)빛나에게도 너무 고맙다. 이들이 투수들을 잘 리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뒤에는 허 코치를 비롯해 선수들에 열과 성을 다한 대표팀 코치진이 있었다. et1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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