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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한영 수교 140주년과 대한제국 외교관 이한응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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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주영한국대사관 이한응 열사 흉상
[주영한국대사관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런던=연합뉴스) 최윤정 특파원 = 주영한국대사관 로비에는 1905년 5월 12일 세상을 뜬 대한제국의 마지막 영국 주재 외교관 이한응 열사의 흉상이 오가는 후배 외교관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이한응 열사는 1901년 주영 공사관에 초대 공사인 민영돈과 함께 참사관으로 부임했다가 1904년 민 공사가 귀국하면서 공사 대리로서 대한제국의 유일한 영국 주재 외교관이 됐다.

그는 런던에 홀로 남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정세를 지켜보면서 백척간두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러일전쟁 발발 직전인 1904년에는 영국 외무부에 대한제국의 주권과 영토가 침탈되지 않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요지의 장문의 글을 전하고, 일본의 지배를 용인하는 영일 동맹 움직임에 항의했다.

주지의 사실대로 결과는 역부족이었다. 약소국의 외교관이 백방으로 다니며 의견을 전해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냉랭했다.

영국 외무부의 차관보는 이 열사가 제출한 글 위에 "그는 아무 것도 모르며, 그의 정부는 그에게 아무런 주의를 기울이지 않음이 분명하다"라고 썼다.

결국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영국은 일본과 제2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일본의 대한제국 감독·보호권을 인정했다.

31살 외교관 이한응 열사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택한 방법은 비통한 죽음이었다.

"국가는 주권이 없고 인민은 평등을 잃었구나. 모든 교섭에 관계되는 일에서 치욕을 당함이 끝이 없구나. 진실로 혈기가 있는 인간이라면 어찌 참아내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이하 생략)"

그는 이렇게 울분에 찬 유서를 남기고 118년 전 이날 침실 방문 뒤 고리에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는 일제에 항거한 최초의 순국이다. 2년 뒤엔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가 일본 측 방해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자 앞서간 이한응 열사의 뒤를 따랐다.

이한응 열사의 시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여러모로 격세지감이다.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의 영토를 침략한 러시아를 강하게 비판하며 우크라이나에 방어력을 지원하고 있다.

이 열사가 치욕을 참으며 조국을 위해 뛰어다녔던 런던의 거리엔 이젠 'K컬처'가 퍼지고 있다.

당시 비교적 신생 박물관이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V&A)에선 한류 전시를 하고 있고, 공연장에선 K팝과 K클래식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으며, 부커 인터내셔널에는 2년 연속 한국 작가 작품이 후보에 올랐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에서 활약하는 토트넘 소속 손흥민 선수 인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곳곳에 한식당이 우후죽순 생기고 있고 일반 식당에도 '코리안 바비큐'·'고추장' 등이 들어간 메뉴가 등장하고 있으며 한국 슈퍼의 품목이 훨씬 다양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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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한 식당에 고추장 들어간 요리 입간판
[촬영 최윤정]


영국 정부도 브렉시트로 유럽과 거리가 멀어진 대신 한국에 부쩍 관심을 갖고 협력을 도모하고 있다.

다만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엔 아직도 한국학 학부를 못 만들고 있고, 한국학 연구 인프라는 일본학·중국학에 비하면 턱없이 빈약하다. 그래도 한국학 전공자를 품을 일자리가 많지 않은 점이 아쉽지만 조금씩은 발전하고 있다.

올해는 한국과 영국이 수교한 지 140년이 되는 해다. 대한제국은 1883년 조영수호통상조약을 맺으며 서양에서 미국 다음으로 영국에 문을 열었다.

세계 외교·경제·문화 주요 무대인 런던에서 한국인임을 지금 정도로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게 되기까지 이한응 열사 같이 앞서 간 이들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주영한국대사관의 외교관들도 이한응 열사의 흉상을 보며 겸허한 마음으로 한 번씩 자세를 바로잡을 것으로 믿는다.

mercie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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