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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분노·결핍·혼돈…조승우의 ‘유령’ [쿡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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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실황. 배우 조승우(뒤쪽)와 손지수. 에스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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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조승우는 20대 초반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오디션을 봐 라울 역에 합격했지만 정작 무대에 오르지는 못했다. 공연 제작사 신입직원이 실수로 오디션 결과를 반대로 전한 탓이었다. 조승우는 뮤지컬 대신 영화 ‘후아유’(감독 최호)에 출연했다. 그 후 20여년. 충무로 흥행 왕으로 자리매김한 그가 마침내 ‘오페라의 유령’ 무대에 섰다. 이번엔 라울이 아니라 유령이다. 세월이 배우를 깊어지게 한 걸까. 1일 부산 드림씨어터에서 본 ‘조 팬텀’은 위압적으로 다가와 끝내 가련하게 떠났다.

나들이객이 많아 공연 비수기로 꼽히는 봄에도 ‘오페라의 유령’은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티켓 가격이 19만원(VIP석)으로 역대 라이선스 공연 중 가장 비싸지만, 조승우가 출연하는 공연은 웃돈을 주고라도 보려는 관객이 태반이다. 배경은 1800년대 프랑스 파리 오페라 극장. 가면으로 흉측한 얼굴을 숨긴 유령은 신인 오페라 가수 크리스틴을 흠모하며 그에게 음악을 가르친다. 크리스틴의 마음은 귀족 라울에게 향해 있다. 라울도 크리스틴을 사랑한다. 비극은 그렇게 시작된다.

유령은 살인마다. 한 명도 아닌 여러 명을 죽였다. 크리스틴을 향한 구애도 순애보라기엔 뭣하다. 그는 크리스틴에게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고 때론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도덕률만으로 그를 판단할 순 없다. 악당이라 부르자니 연민을 자아내고, 마냥 동정하기엔 신비롭고 권위적이다. 이 간극이 관객을 긴장시키며 이목을 모은다. 양면성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뮤지컬 ‘지킬앤하이드’를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지킬·하이드가 등을 맞댄 선악이라면, 유령은 분노와 결핍, 증오와 사랑이 뒤엉키고 뒤틀린 카오스다. 오죽하면 천하의 조승우마저 “긴장과 두려움, 기대가 공존한다”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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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의 유령’ 실황. 에스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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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조승우는 조승우다. 그는 긴장과 두려움이라는 말이 엄살로 느껴질 만큼 완벽하게 유령을 소화한다. 뮤지컬 ‘헤드윅’ ‘스위니토드’ 등에선 배우 본체의 매력으로 캐릭터를 완성한다는 인상이 강했는데, 유령은 캐릭터에 자신을 붙인 듯한 모습이다. 가면으로 얼굴 절반을 가렸는데도 카리스마와 아우라를 뿜어낸다. 압권은 마지막 장면이다. 그는 눈에서 눈물을 쏟아내고 두 손을 바들바들 떨면서 위악으로 감춰둔 유령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출연작 중 가장 성악에 가까운 발성을 들려줘 귀도 즐겁다. 조승우는 첫 공연을 마친 뒤 제작사를 통해 “절실한 마음으로 무대에 첫발을 디뎠다”며 “그저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은 무대에서 지킨 것 같다”고 말했다.

유령을 번갈아 연기하는 배우들도 명성이 자자하다. 뮤지컬 스타 전동석과 JTBC ‘팬텀싱어2’에서 준우승한 김주택이 캐스팅됐다. 오는 7월 시작하는 서울 공연에선 최재림이 합류한다. 크리스틴 다에 역엔 신인배우 손지수와 송은혜가 발탁됐다. 라울은 배우 황건하, 송원근이 맡았다. 조연 배우 가운데선 윤영석과 이상준이 눈길을 끈다. 각각 극장주 무슈 앙드레와 무슈 피르맹을 연기한다. 윤영석은 역대 ‘오페라의 유령’ 한국어 공연에 모두 참여했다. 이상준은 2009년 조셉 부케 역으로 이 작품에 500회 넘게 출연했다. 콧대 높은 프리마돈나 칼롯타를 맡은 성악가 이지영과 한보라는 곡예에 가까운 노래를 들려준다.

볼거리도 풍성하다. 15m 위 천정에 달린 1t 샹들리에, 안개로 표현한 오페라 극장 지하 호수 등 무대 연출이 아름답다. 이번 시즌 새로 제작한 220여벌의 의상은 조명을 반사해 말 그대로 번쩍인다. ‘싱크 오브 미’(Think of Me), ‘팬텀 오브 디 오페라’(Phantom of the Opera) 등 명곡은 뮤지컬 거장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작품은 1986년 런던, 1988년 뉴욕 초연 이후 전 세계 188개 도시에서 1억4500만명 넘는 관객을 만났다. 오는 6월18일까지 부산에서 공연하고, 이후 샤롯데씨어터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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