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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팩트체크] 튀르키예 교과서에 "한국은 형제국가"라고 쓰여 있다?(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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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월드컵 거치면서 국내서 '튀르키예=형제국' 인식 본격화

튀르키예선 한국전 파병으로 형제국 싹터…'일본 속국→콘텐츠 강국' 인식 변화

주한튀르키예대사관 "우리 교육부 조사 결과 교과서에 '형제국가' 표현 없어"

(서울=연합뉴스) 이웅 기자 = 대지진으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튀르키예에 대한 구호와 지원이 잇따르면서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우호 관계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양국은 서로를 '형제국가'로 부르면서 계기가 있을 때마다 돈독한 관계를 과시해 왔다.

국제개발 사업을 벌이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김민종 팀장은 최근 MBC 라디오에 출연해 "튀르키예 중학교 교과서에 한국이 형제국가로 쓰여 있다고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는 튀르키예에서 우리나라를 형제국가로 부르는 것이 단순한 호의나 외교적 수사 이상이란 뜻으로 풀이된다. 과거 언론 보도에서도 튀르키예 중학교 교과서에서 '고대에 양국 민족이 형제로 같이 살았다'고 가르친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설왕설래는 있었지만 튀르키예가 교과서에서까지 한국을 형제국가로 지칭하는지 실제로 확인한 사례는 찾기 어렵다. 그렇다면 '형제국'이란 양국의 특별한 우호 관계는 언제, 어떤 계기로 형성된 것일까?

연합뉴스

이스탄불 첨탑에 비친 BTS와 비빔밥 영상
(이스탄불=연합뉴스) 김승욱 특파원 = 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은 개원 10주년을 맞아 16일(현지시간) 이스탄불 갈라타 탑 외벽에 한국과 터키의 우정을 주제로 한 영상을 상영했다. 2021.11.17 kind3@yna.co.kr




튀르키예 사람들은 한국을 '칸 카르데쉬'(kan kardesi)라고 부르는데 칸은 '피'(血)를, 카르데쉬는 '형제'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풀어보면 '피로 맺어진 형제'라는 뜻인데 '혈맹'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과거 언론 보도를 튀르키예의 옛 표기인 '터키' 혹은 그 한자 음역어인 '토이기(土耳其)'와 '형제'를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튀르키예에서 한국을 형제국가로 부른다는 사실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시점이 1950년대라는 걸 알 수 있다.

1955년 9월 9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는 국제 행사 참석차 튀르키예를 방문했던 기자가 '미지(未知)의 나라, 토이기'의 사회상을 소개하면서 말미에 '현지인들이 한국 사람을 자기네와 같은 조상의 자손이라고 하며 친구라 부르지 않고 형제라 부른다고 했다'고 전한 내용이 나온다.

이 같은 우호적 정서가 언제,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튀르키예 현지의 과거 언론 보도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연합뉴스

1955년 9월 9일자 조선일보 튀르키예 기행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 기사 캡처]



손영은 튀르키예 국립 이스탄불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강의교수는 2021년 논문 '터키 언론 속에 나타난 한국 및 한국인의 이미지 변화 양상'에서 튀르키예 언론 보도에 나타난 튀르키예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시선과 태도를 상세히 분석해 놨다.

이 논문에 따르면 튀르키예 언론에서 한국을 독립적인 국가로 보도하게 된 시기는 1950년대부터다. 그 이전까지 한국에 대한 보도는 수가 많지 않고 대부분 일본 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을 짧게 언급하는 정도에 그친 것으로 파악됐다. 이는 튀르키예 사회에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1950년 한국전쟁 참전임을 시사한다.

한국전쟁 당시 튀르키예는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파병을 결정했는데 참전 병력(연인원)은 1만4천936명으로 16개 참전국 중 미국(178만9천명), 영국(5만6천명), 캐나다(2만5천687명)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으며, 전사자는 741명으로 미국(3만6천940명), 영국(1천78명)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희생을 치렀다. 이는 한국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공식 집계치로, 한국으로 이송 도중 배 위에서 정전을 맞은 5천여명과 160여명의 실종자를 포함하면 튀르키예의 실제 참전 병력과 전사자는 더 많다.

당시 튀르키예 정부는 '세계 안보와 평화 수호를 위해 한국에서 남한과 미국 형제들과 함께 싸우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국민의 자발적 참여 분위기를 조성했다. 참전을 독려하면서 가족(형제애), 명예, 평화를 강조한 것이 큰 호응을 얻었다.

[표] 한국전쟁 참전국 전투부대 파병 및 인명피해 현황(명)

국명참전연인원사망부상실종포로인명피해
합계
미국1,789,00036,94092,1343,7374,439137,250
영국56,0001,0782,6741799774,908
호주17,1643391,2163261,584
네덜란드 5,322120645- 3768
캐나다25,6873121,2121321,557
뉴질랜드3,79423791- 103
프랑스3,4212621,0087121,289
필리핀7,4201122291641398
튀르키예14,9367412,0681632443,216
태국6,3261291,1395- 1,273
그리스4,992192543- 3738
남아프리카공화국82634- - 943
벨기에3,4989933641440
룩셈부르크83213- - 15
콜롬비아5,100163448- 28639
에티오피아3,518121536- - 657

[※자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자료 발췌]

한국에 대한 튀르키예 국민들의 우의(友誼)는 전쟁 이후에도 지속됐다. 튀르키예 정부는 수도 앙카라 도심에 한국공원을 조성하고 참전용사 기념탑을 세워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 분위기를 이어갔다. 게다가 연인원 2만명에 달하는 참전용사들이 튀르키예로 귀환한 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무용담과 함께 한국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두고두고 전파했다.

조홍윤 튀르키예 국립 이스탄불대학교 한국어문학과 조교수는 2020년 논문 '터키 한국전쟁 참전용사 구술생애담에 나타난 한국인, 그 약자의 형상'에서 "터키인들이 한국인을 피의 형제로 지칭하며 다소 무조건적인 호의를 보내게 된 것은, 그처럼 강렬한 울림을 지닌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의 기억이 그들의 주변으로 파급되어 이제는 터키 일반의 한국 인식으로 굳어지게 된 맥락이라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상 튀르키예 정부의 전격적인 한국전쟁 참전 결정은 자국의 안보를 위한 전략적 판단이었다는 게 학계에선 정설로 통한다. 당시 일반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았지만 튀르키예 정부는 역사적으로 앙숙인 소련의 위협에 대응하고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희망했다. 이 때문에 지체 없이 파병을 결정했고 서방 국가들로부터 참전 공로를 인정받아 1952년 나토 가입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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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 튀르키예군
[연합뉴스 사진 자료]



참전국들 대부분이 정전 후 전투부대를 철수시킨 뒤에도 튀르키예는 1957년 한국과 수교를 맺고서 1개 여단 5천여 명의 병력을 계속 주둔시켰다. 2022년 논문 '1950년대 후반 냉전의 균열과 한국·터키의 문화외교'(박정근)에 따르면, 우리나라와 반공주의, 탈식민·저개발 국가라는 공통점을 가진 튀르키예는 1950년대 후반 주둔 병력을 기반으로 문화교류를 시도하고 동북아시아방위조약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그러다 미국, 한국과의 외교관계가 냉랭해지면서 1971년 한국 주둔 병력을 모두 철수시켰다.

이 같은 외교 관계와 별개로 튀르키예 현지에서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시기별로 변화하며 점차 확대돼 왔다. 앞서 언급한 손영은 교수 논문에 따르면 튀르키예 사람들은 1950년대 이전에는 한국을 일본의 속국으로, 한국전쟁 이후 1960년대까지는 보호와 지원이 필요한 대상으로 여겼다. 그러다 1970년대부터 한국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 주목하면서 경쟁 상대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한국을 롤모델이자 전략적 파트너로, 2010년부터는 '한류, 콘텐츠의 강국'으로 바라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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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OP에 이스탄불 열광
2013년 9월 7일(현지시간)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스탄불-경주세계문화엑스포2013 특별행사인 'K-POP 페스티벌'에서 한류 팬들이 열광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진 자료]



이 같은 흐름 속에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양국 국민들이 서로 강한 연대감을 형성하는 계기가 됐다. 사실 그 이전까지 양국 관계는 '짝사랑'으로 표현할 만큼 튀르키예에서의 관심이 일방적이었고 한국은 무관심했다는 게 학계 평가다.

한국과 튀르키예가 월드컵에서 축구 강호들을 격파하며 나란히 4강에 진출하면서 양국은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런 가운데 한국에서도 튀르키예를 응원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혈맹 관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으며, 이를 지켜본 튀르키예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양국 관계가 재조명됐다. 이는 2005년 한국 대통령(노무현)의 첫 튀르키예 방문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우호적인 양국 관계의 기원을 고대(古代)로 소급하려는 시도가 확산됐다. 튀르키예 국민들이 민족의 뿌리로 생각하는 돌궐(突厥·튀르크(Turk)의 음차)이 1천500년 전부터 고구려와 동맹 관계였기 때문에 실제로 '피를 나눈 형제국'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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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 한국·터키 공동 응원
2002년 6월 29일 대구에서 열린 한일 월드컵 한국-터키 3.4위전을 앞두고 서울 시청 앞에 모인 시민들이 태극기와 터키기를 함께 들고 응원하는 모습 [연합뉴스 사진 자료]



튀르키예가 6∼8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에 광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한 돌궐의 후예라는 것과, 중국을 통일한 수(隋)·당(唐)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고구려가 돌궐과 손을 잡았다는 건 역사학계에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구려와 돌궐이 항상 협력 관계로 있었던 건 아니다. 고구려는 돌궐보다 먼저 북방 초원지대를 지배한 유연(柔然)과 오랜 제휴 관계였는데, 6세기 유연을 격파하고 부상한 돌궐과 충돌하기도 했다.

2006년 논문 '고구려와 돌궐의 전쟁'(강선) 등을 보면 고구려 입장에서 돌궐은 지금의 국제 정세 못지않게 복잡했던 고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 속에서 때로 대립하고 때론 협력하기도 했던 외교 상대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양원왕 때 돌궐이 고구려 북변 요충지 신성을 포위 공격하다 여의치 않자 백암성을 공격했으나 패배했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과 튀르키예는 언어적으로도 공통점이 적지 않지만, 혈연 관계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삼기는 충분치 않아 보인다. 이상신 아주대 국문과 교수는 "국어학계에선 한국어와 튀르크어를 모음조화 등의 특질을 공유하는 알타이어족으로 분류하는 학자들이 많다"며 "하지만 (알타이어족) 아래 4개 어군 중 한국어군은 튀르크어군 등 나머지 3개 어군과는 상대적으로 공통점이 적어 일찍 분기돼 나왔거나 아예 알타이어족에 포함되지 않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알타이어족 언어의 지리적 분포
[위키백과 캡처]



2013년 언론 보도를 보면 김용국 당시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장은 "터키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는 한국과 터키는 같은 알타이 민족이며 형제로 같이 살았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후 유사한 내용이 반복해서 보도됐다.

연합뉴스는 지난달 말 주한튀르키예대사관에 자국 중학교 교과서에서 한국을 형제국가로 언급한 내용이 있는지를 문의했는데, 근 한 달 만에 답변을 보내왔다.

주한튀르키예대사관 관계자는 최근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의 교육부에 연락해 조사한 결과 (튀르키예) 교과서와 교육용 자료에 '(한국은) 형제국가'라는 표현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앞서 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도 "2022년도 튀르키예 중학교(5∼8학년) 사회교과서(역사 포함)와 고등학교(9∼12학년) 역사교과서 등 8권을 확인했으나 '한국과 튀르키예는 형제의 나라'라는 표현은 찾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튀르키예 출신으로 한국에 귀화한 언론인 알파고 시나씨는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튀르키예에서 학창 시절 돌궐에 대해 배운 건 초등학교 역사 수업인데 고구려에 관한 언급은 본 적이 없다"며 "중학교 근대혁명사 수업에서 한국전쟁에 대해 다뤘는데 참전을 계기로 양국이 형제국가가 됐다는 내용을 배운 기억이 있다"고 전했다.

튀르키예에서 형제국가는 한국에만 쓰는 말이 아니다.

알파고 시나씨는 "칸 카르데쉬(피로 맺은 형제국)는 일반적인 표현은 아니고 우방국보다는 한 단계 위인데 한국 외에 몇 개 나라가 더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튀르키예와 실제로 같은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해 파키스탄, 보스니아, 코소보, 팔레스타인이 칸 카르데쉬로 불리며, 비이슬람 국가 중에선 한국, 일본, 폴란드가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다.

일례로 일본과 튀르키예는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중동에서의 활동 기반을 넓히고자 오스만 제국(현 튀르키예)과 손을 잡았는데 러일전쟁 때 오스만 제국이 일본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인연으로 오랫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연합뉴스

앙카라 한국공원의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탑
(이스탄불=연합뉴스) 주튀르키예(터키)한국대사관은 25일(현지시간) 앙카라 한국공원에서 6·25 전쟁 제72주년을 맞아 튀르키예군 및 튀르키예 참전협회와 함께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photo@yna.co.kr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실제 외교관계는 얼마나 밀접한 수준일까?

외교부에 따르면 양국 관계는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튀르키예 방문 때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우리나라가 국가별로 맺은 외교적 우호 관계는 '포괄적 전략동맹'(미국)을 정점으로 해 예닐곱 단계로 나뉜다. 그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중간 수준으로 튀르키예를 포함해 멕시코, 루마니아, 카자흐스탄, 알제리, 폴란드, 유럽연합(EU) 등 17개국이 해당한다. 우리나라와 튀르키예는 2013년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됐으며 무역 규모는 지난해 교역액 기준 91억달러로 우리나라 전체 무역 상대국 중 28위였다.

정리해 보면 우리나라와 튀르키예의 우호 관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시작해 경제 발전과 2002년 월드컵을 거치면서 돈독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튀르키예 중학교 교과서에서 한국을 형제국가로 표현했다는 주장은 튀르키예 교육부와 주튀르키예한국문화원의 조사 결과로 보면 근거가 없다.

한국과 튀르키예는 서로를 스스럼없이 형제국가로 부를 정도로 심리적 거리가 가까운 만큼 앞으로 외교관계는 지금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보다 더욱 긴밀해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연합뉴스

'형제의 나라' 구한 한국긴급구호대
(안타키아=연합뉴스) 김인철 기자 = 9일 오전(현지시간) 튀르키예 하타이 안타키아 일대에서 한국긴급구호대(KDRT) 대원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 속에 갇혀 있던 시민들을 구조하고 있다. 2023.2.9 (끝) yatoya@yna.co.kr



abullapi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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