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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시민참여 인도 관리 ‘보도입양제’ 집회장소 제약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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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주가 보도 입양해 청소 등 관리…화분·쉼터도

서울시 11개 자치구가 88곳과 협약 체결해 운영

화분 등 집회 장소 제약…인권위, 악용 우려 표명

경향신문

지난 3월 13일 서울 강남구 포스코센터 앞 보도에 보도입양제를 알리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 정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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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뭘 입양한다고요?” 일반 시민들에게 ‘보도입양제’를 물으면 대체로 이렇게 되묻는다. “언론보도를 말하는 것이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도입한 지 약 10년이나 됐지만 생소하다.

보도입양제는 명칭 그대로 사람이 보행하는 인도를 입양하는 제도다. 이른바 ‘시민참여형’ 보도관리 정책이다. 건축주(건물주)가 건물 앞마당 공공보도의 유지·관리 권한을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위임받아 청소와 보수 등을 담당한다. 또 공공보도에 화분이나 쉼터 등을 조성해 경관을 제고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도로관리청인 지자체는 파손된 보도를 신속하게 보수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현재 서울시에서 시행 중이다.

반면 보도입양제가 악용될 우려도 상존한다. 보도입양제에 참여한 건축주가 공공보도에 대형 화분 등을 설치해 반대 목소리를 내는 집회·시위의 장소를 제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이런 취지의 의견을 표명한 적이 있다.

인권위 “집회장소 제한 결과 가져와”


서울 서초구는 2014년 3월 현대자동차와 보도입양제 협약을 체결했다. 서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 인도가 적용 대상이다. 지난 3월 13일 현장을 찾았다. 해당 인도에 현대차에서 설치한 대형 화분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사옥 정문 출입구에서 염곡사거리까지 100m 구간에는 대형 화분 20개가 줄지어 있다. 염곡사거리 인도에도 크고 작은 화분 17개가 놓여 있다.

사옥 정문에서 하나로마트 후문 방향으로 가는 길에도 현대차가 놓아둔 화분 8개가 보였다. 서초구가 2021년 7월 코로나19 방역 강화에 따라 집회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설치한 화분 12개도 있었다. 화분 20개가 촘촘하게 뒤엉켜 있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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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3일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 염곡사거리 인도에 현대차에서 설치한 화분들이 놓여 있다. 화분 사이에서 현대차 측 사람이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최근 현대차 는 사옥 앞에서 수년 동안 다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유령 및 알박기’ 집회를 했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했다./ 정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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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부터 현대차 주변에서 1인 시위와 집회를 해온 박미희씨(62)는 이런 화분들이 집회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2021년 11월 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했다. 박씨는 “화분 때문에 사실상 집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라며 “단지 타인의 집회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현대차가 화분을 이용한 것을 서초구가 허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부산의 기아자동차(현 기아) 대리점에서 일하다 내부고발을 이유로 해고된 이후 복직 등 문제 해결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현대차 측이 사옥 앞에서 수년 동안 박씨 등의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유령 및 알박기’ 집회를 했다는 의혹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인권위는 그러나 2022년 5월 박씨의 진정을 기각했다. 서초구가 화분을 설치했다고 해서 박씨가 집회·시위를 원천 진행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고 인권위는 판단했다.

다만 인권위는 현대차에서 보도입양제에 따라 설치한 화분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봤다. 인권위는 “서초구는 보도입양제를 통해 결과적으로 박씨의 집회·시위의 장소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보도입양제가 도시경관 증진 등의 명목 아래 집회·시위를 막는 수단으로 악용될 우려도 나타냈다. 인권위는 “보도입양제는 지자체가 특정 개인이나 법인 등에 보도관리 및 화단 설치 등을 위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라며 “이 때문에 집회·시위에서의 의견표출 대상이 되는 기업이나 기관 등이 집회·시위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보도입양제를 적극 이용할 여지를 배제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서초구청장에게 “보도입양제가 국민의 집회·시위를 부당하게 제한할 목적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인권위는 “이 사건의 진정은 기각했지만 지자체가 집회·시위의 방법을 제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화단을 설치하거나 농성을 위한 천막을 철거한 후 재설치를 막기 위해 대형 화분을 설치하는 등 보도입양제를 남용할 경우 집회의 자유가 침해될 소지가 매우 크다”라며 “이 때문에 적절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의견표명을 검토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서초구는 인권위의 의견표명에 따른 후속 조치가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지난 3월 14일 “따로 조치한 건 없다”고 답했다. 이어 “인권위의 의견표명에 대한 별도 입장도 없다”라며 “화분을 철거할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현대차 측도 “화분들은 집회·시위에 영향을 주거나 방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어 “지자체가 추진한 ‘걷고 싶은 거리’ 조성을 위해 보도관리, 조경시설물 및 화분 등을 설치한 것”이라며 “보도입양제의 취지에 맞게 시민들의 보행에 방해되지 않고 쾌적한 환경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화분 설치를 누가 주도했는지를 두고는 서초구와 현대차의 입장이 엇갈렸다. 현대차 측은 “화분 설치는 서초구가 먼저 요청을 해온 것”이라고 했다. 반면 서초구 측은 “보도입양제에 따라 협의를 해서 설치한 것이지, 우리가 먼저 요청을 한 게 아니다”고 반박했다.

보도입양제는 아니지만 지자체가 집회 개최 등을 막기 위해 대형 화분 등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산 사례는 과거에도 있었다. 서초구는 2021년 8월 13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 2차로에 대형 화분 154개를 설치해 논란이 됐다. 서초구는 코로나19 방역과 지속적인 집회 개최로 인한 민원 발생 등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서울시 옴부즈만은 그해 9월 서초구의 조치가 과도하다며 철거를 권고했다. 2013년엔 서울 중구가 덕수궁 대한문 앞에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천막을 추가로 설치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화분과 화단을 설치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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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13일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 앞 공개공지 입구에 화분 여러 개가 설치돼 있다. / 정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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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현대차 본사 앞 염곡사거리 쪽에 있는 ‘공개공지’에 현대차 측이 화분을 설치한 것도 논란이 되고 있다. 공개공지는 시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곳 공개공지에는 화분 수십 개가 들어서 있다. 입구에도 대형 화분 여러 개가 놓여 있어 사람 한명만 진입할 수 있는 상태다. 또 공개공지라는 사실을 알리는 안내판도 보이지 않았다. 건축법과 서울시의 건축 조례 등에 따르면 공개공지의 출입을 차단하는 시설을 설치하는 등 활용을 저해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알기 쉽도록 ‘시민들이 이용하는 공개공지(쉼터)입니다’ 등의 안내판과 배치도 등도 설치해야 한다. 서초구 측은 “예전에는 안내 표지판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게 없다면 조치를 취할 예정”이라며 “공개공지의 화분 등이 출입에 방해가 된다면 시정 조치하도록 현대차에 얘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주로 대형건물 참여, 88곳에서 시행


“공공재산인 보도를 시민과 함께 관리해 쾌적한 보행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보도입양제의 취지다. 서울시가 2013년 첫 도입했다. 미국이 1985년에 시작한 ‘도로입양사업’을 벤치마킹했다. 서울시가 제도 운용을 총괄하고 구체적인 보도입양제 협약 체결은 자치구가 진행한다.

건축주는 지자체 대신 보도를 청소하고 파손된 보도를 보수하는 업무를 맡게 된다. 보도입양제는 협약을 체결하면 기본 3년 동안 유지되고 이견이 없으면 자동 연장한다. 지자체 입장에선 훼손된 보도를 빠르게 발견해 대처하고, 관리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서울시 보도의 연장(延長)이 굉장히 길기 때문에 민원이 들어오지 않는 이상 지자체가 파손된 보도를 즉시 발견하기가 어렵다”라며 “예산 절감보다는 지역 주민이 참여해 보도를 정비한다는 데 방점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보도의 총 길이는 3109㎞에 이른다.

보도입양제가 적용되면 건축주는 지자체와 협의를 거쳐 공공보도의 포장과 재포장 등도 시행할 수 있다. 또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체 비용을 들여 화분과 화단을 설치하거나 쉼터 등을 조성할 수도 있다. 건축주는 본인 소유 건물 특유의 양식, 사업의 특성 등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내도록 공공보도를 꾸밀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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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월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인도에 보도입양제에 따라 고급 재질의 보도블록이 깔려 있다. / 정희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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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보도입양제를 시행 중인 서울 중구 신세계백화점 본점 앞 공공보도에는 고급 포장재가 깔려 있다. 백화점 사유지와 동일한 색깔, 재질, 문양의 보도블록을 공공보도에도 설치한 것이다. 잠시 쉴 수 있는 소형 석재의자도 있다.

서울 25개 자치구 가운데 협약 체결 실적이 있는 자치구는 11개다. 보도입양제 적용 보도는 모두 88곳이다. 강남구가 33곳으로 가장 많다. 강동구 16곳, 서초구 15곳, 중구 10곳으로 두 자릿수를 보이고 있다. 송파·영등포구가 각 3곳, 종로·양천·용산구가 각 2곳, 광진·도봉구가 각 1곳 등이다.

보도입양제에는 주로 규모가 큰 건물을 소유한 단체가 참여했다. 삼성전자, LG, SK텔레콤, 현대자동차, 포스코, KT, 한화투자증권, 롯데호텔 및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신세계백화점 등의 대기업과 그 계열사 등이다. 또 대형은행과 대형교회, 대학도 포함됐다. 한국전력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 등 공기업 2곳도 이름을 올렸다. 서울시 관계자는 “보도입양제에 특별한 조건은 없지만 보통 공공보도까지 관리할 여력이 있는 대형건물이 주요 대상”이라고 했다.

이처럼 대형건물에 적용하기 적합한 제도이다 보니 확장성에 한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도입 초기인 2013년 26곳, 2014년 33곳이 협약을 체결했다. 이후 급격히 줄어 2015~2020년에는 1~8곳에 그쳤다. 2021과 2022년에는 각 3곳만 참여했다. 또 기업과 기관 등 단체가 86곳으로 대부분이고, 개인은 2곳뿐이다.

아울러 구축 건물은 보도입양제에 참여할 유인이 적다는 말도 나온다. 한 구청 관계자는 “신축 건물은 어차피 보도를 새로 깔아야 하기 때문에 보도입양제에 참여할 수 있겠지만, 구축 건물은 구청에서 하던 보도관리 업무를 굳이 떠맡아야 할 이유가 별로 없을 것”이라고 했다.

보도입양제 시행 초반에는 대형건물에 참여를 안내하는 우편물을 발송했다고 한다. 현재는 건물을 신축이나 개축할 때 보도입양제 참여를 권장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는 건축허가를 위한 안내문에 이런 내용을 담았다. 다만 지자체에서 별도의 홍보활동은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구청 관계자는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제도라서 자치구 차원에서 따로 홍보를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보도입양제 적용 보도에는 이를 알리는 ‘표지석’도 설치한다. 그러나 크기가 작거나, 시간이 흘러 문구가 흐릿해진 탓에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협약 체결자의 뜻에 따라 표지석을 설치하지 않은 곳도 있다.

서울시 외에 다른 16개 시·도에 보도입양제 도입 여부를 문의했지만 “없다”고 답했다. 일부는 “개별 시·군에서 조례를 통해 할 수도 있겠다”라며 여지를 둔 곳도 있었다. 다만 한 도청 관계자는 “보도입양제는 서울의 특수성이 반영된 사업인 것 같다. 서울처럼 대형건물이 많이 들어선 곳에서나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도청 관계자도 “대도시권에서나 가능한 제도로 보인다”고 했다.

정희완 기자 rose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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