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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1 (금)

이슈 미얀마 민주화 시위

중·러 등에 업은 미얀마 군부…‘봄’은 죽어간다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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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과정에도 빈번한 쿠데타와 군사정부

독립 영웅 아웅산과 민주화운동 아웅산 수치 부녀의 비극

쌀 자급자족·인도양 접근 전략적 요충지 등 오랜 강점

미·영·유엔 등 제재 강화 주장에도 중·러는 소극적

1947년, 1962년, 1988년, 2008년, 2015년, 2021년.

곡절로 가득 찬 미얀마 현대사의 주요 분기점으로 불릴 만한 해이다. 미얀마는 2차세계대전 이후인 1948년 독립 당시 버마연방이라는 국명으로 중립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영국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대개 영연방의 일원이 되는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독립 버마는 소수민족 주민들이 전체 인구 5500만 명의 3분의2를 차지했다. 보물 옥과 금, 티크 나무 등의 자원을 지닌 지역의 포함한 국토의 절반 이상이 소수민족의 관할권에 놓여있었다. 비옥한 이라와디강 인근의 낮은 지대엔 최대 민족인 버마족이 자리를 틀고, 고지대엔 소수민족이 자리했다. 인도양으로 가는 요충지에다가 쌀을 자급자족하는 등 경제적으로 풍요를 구가할 환경을 구비한 상태이기는 했다. 그러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30인의 동지’의 핵심으로 활동한 아웅산이 독립을 앞두고 암살되며, 버마의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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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교민들이 지난 1일 방콕 주재 미얀마대사관 앞에서 저항을 뜻하는 손가락 3개를 펼친 채 군부 정권에 항의하고 있다. 방콕=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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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은 30인의 동지 또 다른 핵심 축이었던 네윈 장군이 쿠데타 세력을 진두지휘하며 민주화의 꿈을 좌절시킨 해이다. 네윈은 1988년 민주화시위로로 사실상 최고 권좌에서 내려올 때까지 버마식 사회주의 집권체제를 공고히 했다. 1988년엔 민주화시위로 수도 양곤의 봄이 그려지던 해이다. 오랜 기간 영국에서 머물던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치 여사가 어머니 간호를 위해 귀국한 것도 좋은 흐름이었다. 국민의 열망에 수치는 호응했다. 그러나 군부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수치 여사를 체포해 가택연금했다. 그 사이 국호는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뀌었다. 국내에서 핍박과 달리 국제사회는 수치 여사의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지했으며, 그는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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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사정권을 이끄는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이 1월 31일 미얀마 네피토에서 열린 국가방위안보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네피도=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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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쿠데타·민정이양·군정…자유의 봄은 언제?

민정이양 희망을 담금질하던 미얀마는 2008년 그 분기점을 지켜봤다. 군정 통치기구가 국회 의석의 25%를 군대에 할당하는 내용을 담은 개정 헌법을 공포했다. 이후 국제사회는 의심스런 눈초리 속에서도 미얀마의 민주화 행로를 기대했다. 군정 통치기구가 해산하고 우여곡절 끝에 2015년 선거에서 수치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완승을 거두면서 이런 기대감은 점차 확신으로 이어졌다. 수치 여사는 당시 선거 압승에도 자녀가 영국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지는 못하고, 국가고문 자리에 취임했다. 헌법규정에 따른 것이었지만, 수치 고문이 대통령이 되는 상황까지는 군부가 양보할 수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수치 고문은 외교장관 역할을 겸하면서 사실상 총리 역할을 수행했다. 미국과 중국 등 국제사회와 교류도 활발하게 이어갔다. 금융과 교육 부문 등에서 개방화를 이끌었고, 인플레이션 방지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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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민주화를 염원하는 시위대가 2021년 3월 14일 양곤에서 시위 도중 다친 주민을 급하게 옮기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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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국민의 30% 이상이 빈곤상태인 상황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으며, 군부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했다. 다민족·다종교로 이뤄진 미얀마 상황은 수치 고문에게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2017년 이후 방글라데시 인접지에서 소수민족 로힝야족에 대한 인종학살 문제로 미얀마 정부는 국제적인 비판을 받고 있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 수치 고문이 초심을 잃었다는 비판도 수시로 제기됐다. 수치 고문이 정부의 상징이 됐던 초기만 하더라도 각국의 투자가 줄을 이었지만, 점차 매력을 잃고 있었다. 외국직접투자(FDI)만 하더라도 2019년 47억 달러에서 2019년 23억 달러로 급감했다. 양곤만 하더라도 미국 뉴욕에 버금가는 국제도시였다는 20세기 초의 명성을 일부 회복하는 느낌이었지만, 그 위세는 2020년을 앞두고는 급격하게 꺾이기 시작했다.

그나마 국제사회 일각의 비판에도 국내 여론은 호의적이었다. 30대 초반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독립영웅을 아버지로 둔 수치 고문에 대한 국민의 애정은 그만큼 각별했다. 그 인식이 2020년 11월 총선 결과로 집약됐을 수 있었다. 수치 고문의 NLD는 당시 총선에서 전체 의석의 83%를 휩쓸었다. 2015년 선거 결과보다도 나았다. 이런 흐름을 눈치 챈 군부는 선거 직전, 부정선거가 자행되고 있다는 경고장을 날리며 불안감을 드러냈다. 선거관리위원회와 국제감시단이 선거부정 행위는 없었다고 평가했지만 군부는 초언 이후에도 선거부정이 자행됐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전체 의석의 25% 확보마저 불투명하게 되자, 개혁에 대한 경고음을 연이어 발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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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 거주하는 미얀마 교민들이 저항을 상징하는 손가락 3개를 편 채 지난 1일 방콕 시내에서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의 사진을 들고 군정의 비상계엄사태 2년 연장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방콕=AP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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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 고문의 대응을 놓고 전문가들의 의견은 갈렸다. 군부의 영향을 기존대로 인정하면서 점차적인 개혁을 했어야 한다는 의견과 개혁 속도를 높이면 군부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수치 고문과 군부가 2021년 1월에도 만남을 이어가고, 미얀마의 최대 지원국인 중국 고위층이 양측을 다 접견하면서 미얀마의 향후 정국을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렸다. 이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관찰이었다는 게 2021년 2월 1일 확인됐다. 그해 2월 첫주 후반에 새로운 의회가 구성되면 영향력 약화 불가피하다는 점을 우려했을 군부가 주초인 2월1일 쿠데타를 감행했던 것이다. 수치 고문의 주도로 구성될 의회 구도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에 균열을 가져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작용했다는 게 정설이다.

군부는 쿠데타 직후 수지 고문과 윈민 대통령을 체포했다. 군부로서는 정변을 일으키고 체포하는 게 문제이지, 수치 고문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군부는 수지 고문에 대해 선동 혐의와 코로나19 방역 조치(자연재해법) 위반 혐의, 공무상 비밀 보호법 위반 등 12가지의 혐의로 기소했다. 1년 6개월 이상 걸리는 공판·재판을 거쳐 구치 고문은 모두 합해 33년형을 선고받았다. 미얀마 국민들은 물론 국제사회도 아연실색했다. 쿠데타 직전에 제기됐던 일각의 우려가 현실화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컸다. 수치 고문 측이 쿠데타 발발 이전에 좀더 세밀하게 정국흐름을 가져가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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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 군사정부가 비상계엄사태를 6개월 연장하기로 한 이후인 2일 최대도시 양곤 도심의 거리 모습. 오가는 차량들은 있는데, 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양곤=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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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지부동 군부…아세안은 불간섭, 중·러와는 밀착

쿠데타 발발로 군사정부의 비상계엄사태가 2년 넘게 이어진 미얀마에 봄은 올 수 있을까. 쿠데타 발발 직후 주요도시에서 군정에 반대한다는 시위와 국제사회의 제재가 이어지고 있지만, 군부는 요지부동이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살펴보면 유엔은 지난해 12월 미얀마에서의 폭력 종식과 정치법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유엔 표결엔 중국과, 러시아, 인도 등이 불참해 의미는 반감됐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서방은 개별 국가 차원에서 경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미국은 지난 1월 제재 강도를 높였지만, 미얀마의 최대 무역 상대국인 중국은 제재 동참을 거부했다. 중국은 오히려 군정을 인정하고 있다. 지난해 7월 왕이 당시 중국 외교부장은 2021년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해 “중국과 미얀마의 관계는 굳건하다”며 군정에 힘을 실어줬다. 중국과 미얀마를 잇는 경제회랑 프로젝트 협력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했다. 이런 관계를 반영하듯 지난해 중국의 미얀마 직접투자 추정액만 10억 달러에 달한다. 군정은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펼치고 있는 러시아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민 아웅 흘라잉 사령관은 지난해 러시아를 2차례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향해 “세계적인 리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만남에서 경제적인 협력 방안도 논의했다. 니콜라이 리스토파도프 미얀마 주재 러시아 대사는 “국제사회의 제재는 위기를 더 조장할 뿐”이라며 제재 부과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정 불간섭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회원국도 개입을 자제하고 있다. 올해 의장국을 맡은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움직이고 있기는 하지만, 아세안을 중심으로 눈에 띄는 성과를 낼지는 미지수다. 당장 미얀마 최대투자국인 싱가포르의 리센룽 총리는 최근까지도 “제재는 군부가 아닌, 주민들을 어렵게 할 뿐”이라고 제재에 반대하고 있다. 세계은행은 미얀마의 성장잠재력이 낮아지면서 투자 매력이 거의 없다는 진단을 내놓은 상태다. 다른 회원국인 캄보디아, 라오스, 베트남 등도 적극적인 목소리를 낼 처지가 아니다. 미얀마 군정이 태국 군대 엘리트와는 의견교환까지 한다는 분석도 있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와 중국의 존재는 미얀마 군부의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일례로 군정이 지난해 7월 30년 만에 사형수 4명에 대해 형을 집행했을 때 국제사회는 경악했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침묵을 지켰다. 미얀마 군정은지난해 11월엔 예비역 장교를 저격하려던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로 대학생 7명에 대해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 군정은 중국과 러시아 등의 사실상의 지지 내지 방관 속에 천연가스 수출 등을 통해 경제 분야에 대한 통치력을 잃지 않고 있다. 자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진 것과는 별개로 군부가 결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어렵게 민주화 궤도 열차에 탑승했던 미얀마가 군부의 쿠데타로 좌절을 겪은 지 2년이 넘었지만, 이를 극적으로 타개하기가 쉽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외부의 제재가 단일대오를 형성해도 힘들 상황에서 국제사회의 시선은 미국과 중·러가 다른 상황이고, 천연가스 등을 활용하는 미얀마 군부의 자체 생존력도 강하다.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인도네시아의 움직임에 기대의 시선이 있기도 하지만, 미얀마 군부를 견인할 정도의 힘을 가졌는지는 의문이다. 아세안은 회원국의 내정에 불간섭주의를 택하고 있고, 인도네시아 등 극히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미얀마에 대해 민주화 일정표를 제출하라고 권고할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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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레포르마시의 상징 안와르…30년 만에 총리에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127515344

외환위기로 몰락, 코로나로 부활…‘25년 지각 총리’ 안와르의 돌파구는?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129506371

‘60년 애증’ 싱가포르 방문한 안와르…‘디지털·그린 경제’로 관계 개선 물꼬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201513845

미얀마 군정 2년의 재앙…롤모델 인도네시아, 해법 찾을까?

https://www.segye.com/newsView/20230205506657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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