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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짜릿하고 황홀한 욕망… 영화를 사랑한다면 봐야 할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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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짜릿하고 황홀한 욕망… 영화를 사랑한다면 봐야 할 영화

서울흐림 / 7.0 °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빌론이여. 모든 나라에게 그의 음행으로 말미암아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바빌론은 성경의 요한계시록에서 타락의 도시로 묘사된다. 유대인들이 잡혀가 박해 받던 땅이며, 사치의 심장부이자 색욕으로 물든 쾌락의 도시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상징인 바벨탑과 연관 짓기도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빌론은 창녀로도 묘사된다. 성경에서 바빌론은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으며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칭하였다.

고고학이나 역사학적으로 보면, 바빌론은 독일 고고학자에 의해 그 흔적이 발견된 실체가 있는 번성한 고대 도시다. 지금도 독일 베를린으로 옮겨진 이슈타르의 문으로 불리는 고대 바빌론의 거대한 성문을 통해 화려했던 영화를 엿볼 수 있다.

1일 개봉한 ‘바빌론’은 천재라 불리는 데이미언 셔젤이 극본을 쓰고 메가폰을 잡은, 1920∼30년대, 할리우드 격동의 시대를 그린 영화로 제목 그대로 성경 속 바빌론을 떠올리게 한다.


황량한 사막이나 다름없었던 캘리포니아의 허허 벌판 위에 세워진 할리우드는 격정과 광란, 돈과 마약, 섹스, 꿈과 희망이 뒤엉킨 ‘영화의 제국’이다. 카메라는 1920년대와 30년대,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격동기의 할라우드와 이 시대를 산 대배우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스타를 꿈꾸는 배우 지망생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 성공한 삶을 갈구한 멕시코 출신 청년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의 삶을 쫓는다.


영화는 초반부터 강렬하다. 영화사인 키노스코프 사장의 저택에서 열린 파티는 ‘우상’처럼 기이한 얼굴과 풍선으로 장식됐고, 트럼펫과 드럼의 변주 속에 변태적 성행위와 집단 섹스, 마약, 음란한 노래와 춤의 향연이 벌어진다. 여배우가 약에 취해 기절하고, 코끼리까지 등장하는 대혼돈 속에 악보는 포르테에 포르테를 더하고, 바빌론을 상징하는 붉은 원피스를 입은 넬리의 눈을 뗄 수 없는 매혹의 춤으로 파티는 절정을 맞는다.

영화는 이제 막 시작됐는데 셔젤은 난데없는 클라이맥스에 정신이 멍한 관객을 할리우드 촬영장으로 데려간다. 이곳 역시 파티장 못지 않은 광란의 도가니다.


황량한 벌판에선 광기의 대규모 전투 장면 촬영 속에 카메라가 다 부숴지고, 스태프와 배우가 다치는 사고가 속출한다. 매니가 우여 곡절 끝에 구해온 마지막 카메라로 잭은 무사히 신을 찍고, 파티에서 우연히 영화사 사장의 눈에 들어 단역 출연 기회를 얻은 넬리는 신들린 눈물 연기를 선보이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그들의 앞날에 서광이 비추고 있다.


꽤 ‘스포’를 한 것 같지만, 영화는 이제 막 서막을 끝냈을 뿐이다. 무성 영화 시대가 끝나고 유성 영화의 시대가 다가오면서 모든 건 변한다.

셔젤은 할리우드 초기의 변화를 사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드라마로 만들어 냈다. 여기엔 할리우드의 어두운 진실과 영화를 향한 열정이 동시에 담겨있다.

1920년대 할리우드는 향락에 찌들었고, 엑스트라는 인권도 없이 헐값에 일해야 했다. 할리우드의 영화 산업은 이미 거대했지만, 그럼에도 실제 영화사에서 1927년 ‘재즈 싱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영화는 연주나 촌극에 곁들이는 극장의 구색 맞추기였다.



그러다 1930년대 유성영화가 활성화하며 모든 것이 달라진다. 캘리포니아 대지에 설치됐던 촬영장은 음향의 잡음을 없애기 위해 실내 스튜디오로 이동했고, 대공황의 후유증 속에 새 포멧에 적응하지 못한 영화사와 배우, 스태프가 뒤안길로 사라진다.

바빌론엔 무성영화 시절 잘 나가던 배우들이 한데모여 ‘싱잉 인 더 레인’(번안 제목 ‘사랑은 비를 타고’)을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우습게도 1954년에 개봉한 영화 싱잉 인 더 레인은 유성 영화에 적응하지 못해 고전한 배우가 주인공이다.

잭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데, 엉터리 이탈리아어를 쓰다가 차이는가 하면, 유럽 출신의 새 아내와는 아예 말이 통하질 않는다. 브로드웨이 출신의 아내에게는 할리우드의 예술성을 모른다며 비난을 퍼붓는다. 유럽 영화와 브로드웨이를 향한 할리우드의 애증을 드러내는 듯하다. 셔젤 감독은 낸시의 행동을 통해 스스로도 자유롭지 못할, 할리우드 자본에 대한 독설도 서슴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퇴폐적이고, 권선징악도 아닌 이 영화가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스크린 밖으로까지 열기가 전해지는 배우들의 연기에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브래드 피트와 마고 로비, 디에고 칼바만이 아니다. 마성의 매력을 지닌 밤의 가수인 레이디 페이 주 역을 맡은 리 준 리, 스타덤에 오른 트럼펫 연주자 시드니 팔머 역의 조반 아데포, 냉혈한 카지노 소유주인 제임스 맥케이로 변신한 ‘스파이더맨’ 토비 맥과이어, 칼럼니스트 진 스마트 역의 엘리노어 세인트 존, 그리고 다른 조연들까지 미친 감독에게 조련이라도 받은 듯하다.

특히, 마고 로비의 연기는 낼리 라로이의 “스타는 되는게 아니라 타고나는 거야”라는 대사를 그대로 믿게 한다. 셔젤 감독은 마고에 대해 “넬리 라로이처럼 스크린을 압도하는 배우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마고 로비였다”고 평했다.

음악은 셔젤이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감독이고, 이번까지 세 작품 모두 저스틴 허위츠 음악감독이 함께 했으니 더 말할 필요 없다.

다시 영화 얘기로 마무리를 지어보자. 영화는 붉은 장미꽃을 떠올리게 한다.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렸지만, 사실은 셔젤의 할리우드와 영화에 대한 ‘가시돋친 찬가’다.

잭이 말한다. “왜 주유소 직원도 영화관엘 가지? 거기선 덜 외롭거든”, “알게될거야. (할리우드가) 세상에서 가장 마법같은 곳이라는 걸.” 옛 스타는 사라졌지만, 할리우드 영화는 지금도 계속된다.

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봐야할 올해의 영화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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