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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동원령이 바꿔놓은 러시아인들의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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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Z' 기호 빛나는 러시아 연해주정부 청사
[지난 4월 촬영. 최수호]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최수호 특파원 = 지난 4월 중순 늦은 저녁, 러시아 극동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연해주정부 청사 전면에서는 커다란 알파벳 'Z'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직원들이 퇴근한 빈 사무실들의 전등을 Z자에 맞춰 켜놓은 것으로, 러시아에서 Z 기호는 우크라이나 특별군사 작전을 지지하는 상징으로 통한다.

당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라 어둠이 내린 도심에서 대형 Z 기호가 빛나고 있는 모습에 묘한 긴장감도 느꼈다.

하지만 이후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접한 현지 주민들의 일상은 정반대 편인 러시아 서쪽 국경 너머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급박한 상황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물가가 올라 예전보다 장보기가 어려워졌다는 하소연은 종종 들을 수 있었지만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고, 주말이면 가족 등과 시간을 보내는 생활은 크게 변한 게 없는 듯했다.

지난 5월 초 러시아가 전승 기념일(5월 9일)을 맞아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하지만 9일 밤 블라디보스토크 도심 중앙광장에서는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대형 불꽃놀이와 축하공연 등이 펼쳐졌다.

주민들은 또 서방 제재로 평소 여름이면 찾았던 동남아 등지로 향하는 비행편이 끊겨도, 자주 이용하던 맥도날드나 해외 의류 브랜드가 철수해도, 마트 진열대에서 코카콜라가 점점 사라져도 "불편할 뿐 생활을 하는데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며 별반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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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동원령으로 가족과 작별하는 러시아 남성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을 발령하면서 도시 분위기는 변했다.

동원령 발령 이틀 후 블라디보스토크시는 공공기관이 문화 축제를 개최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또 동원령 발령 후 연해주에서는 혼인신고 건수도 급격히 늘었다.

사실혼 관계에서 자녀를 두고 지내던 이들이 배우자가 징집되기 전 정식으로 부부관계임을 확인받으려고 서두르는 이유에서다.

혹시 당국이 동원 소집통지서를 들고 찾아온 것일까 봐 저녁 늦게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온 가족이 마음을 졸여야 했다는 시민도 있다.

비단 연해주뿐만 아니라 동원령 이후 분위기가 확 가라앉은 현지인들의 생활상은 러시아 여러 지역에서 나타난다.

이렇다 보니 우크라이나 전황이나 서방 제재 대응 방안 등을 주로 전하던 신문과 방송 등도 이전보다 빈번하게 러시아 시민들의 이야기를 뉴스로 다루고 있다.

현지 매체 등에 따르면 동원령 발령 후 혼란한 상황이 이어지자 쇼핑센터나, 레스토랑, 영화관 등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 사업자들이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고 한다.

징집을 피해 카자흐스탄 등 인접국으로 탈출한 러시아인들이 줄을 잇는 등 까닭에 수도 모스크바 거리에서 남성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보도도 있다.

또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일부 지역은 다가오는 크리스마스 행사나 새해맞이 행사를 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밖에 이번 동원령이 끝난 이후에도 추가 징집이 이뤄질까 봐 시민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외국인인 기자가 현지 주민들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지만, 우크라이나 특별군사 작전이 시작된 지 8개월이 지난 요즘에서야 그들도 국경 밖 현실을 비로소 체감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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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집병 훈련소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su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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