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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이 없기에… 우리 삶은 즉흥 연주죠”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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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허설이 없기에… 우리 삶은 즉흥 연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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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펴낸 영국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 스티븐 허프 홈페이지

영국 출신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 스티븐 허프 홈페이지


지난 2009년 영국 이코노미스트에서 ‘살아 있는 박식가들(living polymaths)’ 2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전공 세분화와 전문화의 시대에도 문과와 이과, 철학과 과학을 아우르는 ‘21세기의 다빈치들’을 선정하기 위한 취지였다.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1932~2016),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1933~2015), ‘총, 균, 쇠’의 저자인 인류학자 재러드 다이아몬드(85), ‘괴델, 에셔, 바흐’의 저자인 인지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77) 등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대거 포함됐다.

이 명단에 들어간 영국 출신의 세계적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가 스티븐 허프(61)였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지금까지 60여 장의 음반을 녹음하고 30곡이 넘는 자작곡을 발표했으며, 음악과 종교에 대한 책은 물론이고 소설까지 펴낸 작가이니 말이다. 2012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었던 화가이기도 하다. 이 별명에 대한 당사자의 소감은 어땠을까. 본지 서면 인터뷰에서 허프는 “전혀 좋아하지 않는 별명!”이라고 느낌표까지 넣어서 위트 있게 답했다.

이 똑똑한 박식가에게는 코로나 사태도 기회가 된다. 허프는 지난 2년간 6장의 음반을 새로 녹음했고 3곡의 신곡을 썼다.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의 음반을 위해 편곡 작업도 맡았다. 그는 “코로나 사태로 내 연주 일정이 모두 중단되는 바람에 갑자기 많은 시간이 남게 됐다. 이 기회를 그저 휴가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느 때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는 시간으로 삼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의 신곡 가운데 하나가 올해 반 클라이번 콩쿠르를 위해서 작곡한 피아노 독주곡 ‘팡파르 토카타(Fanfare Toccata)’였다. 우승자 임윤찬을 비롯해 30명의 본선 참가자들은 모두 한 번씩 이 곡을 연주했다. 대회 심사위원이기도 했던 허프는 “내 작품을 서른 번이나 듣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지만, 동료 심사위원들이 날 미워하지나 않을지 두렵기도 했다”고 말했다. 임윤찬은 이 곡으로 현대음악 연주상을 받았다. 허프는 “1차 라운드에서 연주할 적부터 임윤찬이 결선까지 올라가기를 기원했다. 특히 준결선에서 리스트의 ‘초절 기교 연습곡’을 연주할 때는 그가 ‘초월적(transcendental)’ 경지에 올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국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의 에세이집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현암사

영국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스티븐 허프의 에세이집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 현암사


26일 국내 출간을 앞둔 ‘한 번 더 피아노 앞으로(현암사)’ 역시 음악과 문학, 종교와 동성애까지 폭넓은 주제를 다룬 그의 에세이집이다. 허프는 “김치가 냉장고에서 숙성되듯이 공항이나 비행기, 호텔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을 적마다 틈틈이 끄적였던 메모들을 조금씩 다듬고 발전시킨 것”이라고 했다. 흡사 한시도 쉴 틈 없이 생각하고 쓰고 일한다는 뜻으로 들렸다.

빈틈없고 야무지게만 보이지만 의외로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실수와 굴욕에 대해서도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소나타 연주 중에는 고개를 뒤로 젖히다가 안경이 3m나 날아가는 바람에 두리번거리느라 객석에서 박장대소가 터졌다. 교회에서 슈만의 ‘환상곡’을 녹음할 때는 새들의 지저귐이 끊이지 않자 육상 출발 신호용 수총(手銃)을 직접 들고 나가서 허공에 ‘빵’ 하고 쏘았다는 일화들이다. 그는 “아무리 준비해도 시행착오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삶은 리허설보다는 ‘즉흥 연주’에 가깝다”고 말했다.


책에서 그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헨리 5세’를 인용해서 연주자를 무대라는 전장(戰場)으로 뛰쳐나가는 ‘전사(戰士)’에 비유한다. 연주자를 호출하는 공연장의 벨 소리는 ‘전쟁의 포성’ 같고,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는 ‘행동이 호랑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3번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의 경기와도 같다. 언제라도 준비된 상태가 되기 위해 훈련 중에 수없이 서브를 네트 위로 넘기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충분하지는 않기에…”라고 말했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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