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25 (월)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스포츠와 인생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헤럴드경제

나는 연휴를 좋아하지 않는다. 상점들이 문을 닫는 긴긴 연휴를 앞두고 생존을 위해 미리 장을 보고, 냉장고 안을 꽉 채우는 것을 싫어하는데도 만일을 위해 조금 과하다 싶게 과일과 유제품 라면 등을 사 놓는다.




연휴가 끝날 즈음에는 남은 음식을 처치하는 게 골칫거리다.

야구와 축구, 그리고 테니스 경기를 보며 추석 연휴를 보냈다.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편이지만 자꾸 보다 보면 좋아하는 선수가 생기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팀,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있으면 경기가 더 흥미진진해진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면 신이 나서 하루가 즐겁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흥분이 가시지 않아 이긴 경기를 곱씹으며 삶의 에너지가 솟구치지만 내가 응원하는 팀이 지면 기분이 착 가라앉고 우울해진다. 사랑한 대가이다. 사랑하지 않으면 슬픔도 없고 환희도 없다.

사랑했기에, 삼진을 먹고 돌아서는 그 모습조차 아름답게 보인다. 추석날 LG 트윈스의 거의 모든 선수들이 안타를 치며 삼성 라이온스를 큰 점수 차로 이겼다. 필요할 때 한방을 터뜨린 김현수의 안타, 오지환의 쐐기 홈런도 멋졌지만 내 뇌리에 가장 깊이 각인된 장면은 처음 타석에 들어선 1번 타자 박해민의 홈런이었다. 예기치 않은 홈런으로 분위기를 가져오며 트윈스가 이겼다. 박해민에게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어쩜 몸이 그렇게 날렵하나. 경기 후반에 삼진을 당하고 (방망이를 휘두르던 반동으로 몸이 회전하다) 돌아서는 그 모습도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지더라도 ‘오지환의 만루 홈런은 멋있었어’ 라고 자위하며 완전히 허무하지 않게 하루를 마감하는 법을 요즘 나는 체득했다. 승률이 선두를 달려도 늘 이길 수는 없어, 지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졌다고 선수들에게 SNS로 쌍욕을 퍼붓는 몰지각한 팬들 때문에 선수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좋아한다면 이기든, 지든 그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 LG 트윈스의 승률이 6할을 넘어, 연패가 드물어 이틀 연속 내 기분이 내려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으니 선수들에게 고맙다.

이기고 잘하는 팀을 좋아하기 마련인데 꼴찌 한화를 응원하는 팬들이 존경스럽다. 1위인 SSG에 3 게임 뒤지는 LG가 남은 경기를 다 이겨서 우승하기를 기도한다. 경기를 지배해서 별명이 ‘오지배’인 주장 오지환이 부상 없이 시즌을 마친다면 LG가 우승할 확률이 높다. 무리하게 도루를 해서 다치지 말고, 불타는 방망이를 믿고 끝까지 밀어붙이면 승산이 있다. 다들 피곤한데 작전을 많이 걸면 선수들이 집중하기 어렵다. 도루나 번트를 자제하고 위기 상황에서도 볼 배합을 포수에게 맡기고 선수들을 믿고 가면 천운이 따르지 않을까.

얼마 전 전주의 서점 소소당에서 행사를 마친 뒤 어느 분이 내게 뭘 하고 싶냐고 물었다. 1분도 지체하지 않고 “야구 해설하고 싶어요”가 나왔다.

고교야구에 심취해 내 방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스트라이크와 볼 판정에 숨을 죽였다. 하굣길에 야구를 잘하는 충암고와 신일고의 야구단 버스가 지나가면 여고생의 가슴은 울렁거렸다. 방과 후에 급우들과 야구장에 가며 무슨 대단한 일탈이라도 한 듯 흥분했었지. 최동원 투수를 보러 가자고 나를 꼬신 그녀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날의 설렘은 내 가슴에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옛 친구를 만나 야구로 밤을 새우면 얼마나 좋을까.

시인·이미출판사 대표

meelee@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All Rights Reserved.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