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라이브러리로 본 모던 경성] ‘멍텅구리’그린 노수현, 근대 산수화 거장으로 성장
'나쁜 마음만 먹어도 징역 10년'이라며 치안유지법을 비판하는 1925년5월17일자 '멍텅구리'. 일본은 1925년5월12일 관동대지진 이후 불안한 시국을 수습한다며 공산주의를 탄압하는 치안유지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독립운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됐다. |
“일전부터 새로 법이 났는데 나쁜 마음만 먹어도 10년 징역이야,쉬-.”
키다리 최멍텅이 사기로 목돈 버는 꿈 얘기를 하자, 땅딸보 친구 윤바람이 손사래친다. 해설엔 ‘치안유지법’이 나온다. ‘꿈에 사기 자랑을 하던 멍텅이는 새로 생긴 치안유지법에나 걸리지 아니할까 눈이 둥그래…’ 조선일보 1925년 5월17일자에 실린 네컷 연재만화 ‘멍텅구리-연애생활’이다.
점심 먹으러 나갔던 최멍텅과 윤바람이 ‘나쁜 마음만 먹어도 10년 징역’이라며 치안유지법을 대놓고 비판하는 만화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이 관동대지진 이후의 혼란을 막는다며 1925년5월12일 시행했다. 공산주의 단속을 내세웠지만 독립운동 탄압에 이용된 악법이었다.
신문 만화의 역사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국계몽단체 대한협회가 1909년 기관지로 발행한 ‘대한민보’에 관재(貫齋) 서화가 이도영(1884~1933)이 말풍선이 포함된 만화를 그린 게 효시로 꼽힌다.
심산 노수현은 심전 안중식의 직계 제자로 산수화에 뛰어난 정통 화단 엘리트였다. 고희동 소개로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심산은 1924년 조선일보에 옮겨와 '멍텅구리'를 그렸다. 1930년대 언론계를 떠난 심산의 서른여덟살 때 모습./ '심산 노수현 화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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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컷 만화 시작한 천리구 김동성
1920년대는 네컷 만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대였다. 조선·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요즘 같은 네컷 만화시대가 열렸다. 미국 신시내티 미술학교에서 만화·만평을 공부한 천리구(千里駒) 김동성(1890~1969)이 깃발을 들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에 합류한 김동성은 창간 첫달인 4월11일 네컷 만화 ‘이야기 그림이라’를 실었다. 하지만 간헐적으로 게재했던 모양이다.
독립운동가 신석우는 1924년 9월 조선일보를 인수해 이상재 사장을 추대하고 ‘혁신 조선일보’를 내걸었다. 발행인으로 옮겨온 김동성은 이상협 편집고문과 함께 네컷 연재만화를 기획했다. 1924년10월13일 연재를 시작한 ‘멍텅구리’다. 국내 첫 신문 네컷 연재만화로 폭발적 인기를 누린 기획이다. 얼마나 인기였든지 1926년 만화 작품으론 처음 반도키네마에서 영화화해 개봉했다.
노수현(앞줄 가운데)이 1926년 중외일보로 옮기자 청전 이상범(앞줄 왼쪽)이 '멍텅구리'를 이어받아 그렸다. 오른쪽은 화가 이승만. 뒷줄 왼쪽은 안석주 학예부장, 오른쪽은 파인 김동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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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10개월간 장기 연재한 ‘멍텅구리’
‘멍텅구리’는 충청도 부농 아들이자 멍청한 키다리 최멍텅과 그의 친구인 땅딸보 윤바람이 평양 출신 기생 신옥매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에피소드가 중심이다. 헛물켜기, 연애생활, 자급자족, 가정생활, 세계일주, 꺼떡대기, 가난사리(살이), 사회사업, 학창생활, 또나왔소 등 1927년 8월20일까지 약 2년10개월간10편의 이야기로 700여회에 걸쳐 연재됐다. 중단 6년 뒤인 1933년 봄 재개될 만큼 잊을 만하면 찾는 인기 코너였다. 2월26일 다시 등장한 ‘멍텅구리’는 김인화가 그렸는데, 몇 달 연재되다가 7월쯤 지면에서 사라졌다.
◇오락만화 넘어 총독부 비판
‘멍텅구리’에는 주인공외에도 순사가 자주 등장한다.주인공을 때리거나 부랑자로 파출소에 가두고, 군중과 만세 소리에 놀라 해산을 명령하거나 부당한 공권력을 행사한다. 이 때문에 순사는 식민지 정부의 폭력 자체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정희정은 이런 현실 비판 때문에 1927년 ‘멍텅구리’를 비롯, 대다수 일간지의 네칸 만화 연재가 중단됐는데 여기엔 총독부의 언론 탄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본다.
'멍텅구리'는 1925년7월25일자에 을축대홍수를 다뤘다. 경찰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해 순사를 때려치우겠다며 모자를 내동댕이치는 장면이다. 당시 일본 공병대 50여명이 뚝섬 주민을 구호하려다 신용산 둑이 터져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강물이 넘친다는 소식에 방향을 돌린 사실이 알려져 조선인의 분노를 촉발했다. |
◇정통 산수화가 노수현, 네컷 연재만화 주역
‘멍텅구리’를 그린 사람이 전통 산수화 대가인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 제자인 심산(心汕) 노수현(1899~1978)이란 사실도 흥미롭다. 노수현은 스승 안중식의 아호 앞글자를 물려받을 만큼, 일찌감치 정통 화단의 주역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춘곡 고희동이 그를 추천해 동아일보에 들어갔다가 1924년 이상협이 본사로 올 때, 함께 옮겼다. 심산은 해방 후 서울대 미대 교수를 지낸 근대 화단의 거목이다.
언론인 조용만은 ‘멍텅구리’ 제작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이상협이 아이디어를 내고 심산이 그림을 그렸는데 처음에 이상협은 심산이 동양화 출신이라 양복장이 서양 풍속의 그림을 잘 그릴까 하고 염려했었는데, 양복 입은 키 큰 ‘멍텅구리’와 키가 작고 보 타이를 맨 ‘윤바람’을 썩 잘 그려 이 만화 때문에 멍텅구리란 말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30년대 문화예술인들’232쪽)
1920년대 후반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김을한은 이상협이 중외일보로 옮겨간 뒤엔 민세 안재홍이 아이디어를 맡아서 냈다는 회고를 남기기도 했다. 노수현은 훗날 “편집국 직원간에 현상 모집하듯 해서 채택된 안을 내가 그렸을 뿐”(‘멍텅구리에서 두꺼비까지 만화 50년’, 조선일보 1970년3월5일)이라고 회고했다. 그래서 만화계에선 멍텅구리를 공동 창작물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노수현의 솜씨가 아니었다면 ‘멍텅구리’가 그만한 인기를 누리진 못했을 것이다.
노수현이 1926년 퇴직하자 심전 문하의 동료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이 뒤를 이어 ‘멍텅구리’를 그렸다. ‘한국화 6대가’에 드는 근대 화단 거장들이 신문 네컷 만화를 번갈아 맡은 것이다.
멍텅구리는 중단 6년만인 1933년 2월 다시 조선일보에 등장할 만큼 인기 코너였다. 조선일보 1933년 2월 23일자 사고 |
◇위스키 한 병 단숨에 들이킨 호주가
노수현은 말술을 마시는 호주가로도 이름났다. 매일신보 기자 조용만이 ‘심산의 주량은 대단해 두꺼비 파리 잡아먹듯 아무 말없이 잔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는 데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한 번은 간송 전형필 생일에 그 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조니 워커 새 병을 따더니 줄줄줄 한 숨에 들이켰다고 한다.
화단 후배인 월전 장우성도 심산을 이렇게 기억한다. ‘다정하고 소박하고 스스럼 없는 성격으로 동료, 후배선배들과도 잘 어울렸다. 그의 주우(酒友)로는 노산(이은상), 횡보(염상섭), 석송(김형원) 등이 주축이었으며 당주동 목천집이 단골이었다…특히 호주가로 알려진 심산은 한번에 적어도 3되는 마셔야 비로소 기운이 나곤 했다. 자리를 함께 했던 주우들은 겁에 질려 도주하는 것이 예사였다고 한다.’
노수현은 1926년 중외일보에 옮겨가 ‘연애경쟁’이라는 만화를 연재했으나 3년 만에 언론계를 떠나면서 더 이상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 1929년 서화협회 감사로 취임한 뒤 명산을 순례하며 산수화를 그리는 데 전념했다. 심산은 청전과 함께 당대를 대표하는 산수화 거장으로 불릴 만큼 성공했고, 서울대 교수에 예술원 회원까지 지냈다. 하지만 만년에 술벗들을 만나면 “뭐니뭐니해도 신문 기자 때가 좋았어”하며 웃었다고 한다.
시사만화가 안의섭이 대선배 노수현을 찾아갔다. 조선일보 1970년 3월5일자 |
◇참고자료
정희정, ‘만화 멍텅구리로 본 근대 도시, 경성의 이미지’, ‘미술사논단’ 통권43호,2016
서은영, ‘코믹스의 기획과 대중화: 신문연재만화 ‘멍텅구리’를 중심으로’, ‘서강인문논총’31, 2011
장하경, ‘멍텅구리의 이야기 기법’, ‘한국학보’119, 2005
대한언론인회, 한국언론인물사화 8·15전편 下, 1992
손상익, 한국만화통사 상, 시공사, 1999
윤영옥, 한국신문만화사:1909-1995. 열화당, 1995
최열, 한국 만화의 역사, 우리 만화의 발자취 일천년, 열화당, 1995
김을한, 인생잡기,일조각,1989
조용만, 30년대의 문화예술인들, 범양사, 1988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조선일보 사람들, 랜덤하우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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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 학술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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