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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이슈 유가와 세계경제

‘악마의 시’ 34년... 표현의 자유가 테러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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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슈디, 한쪽 눈 실명 위기

신성 모독 논란으로 이슬람권서 살해 위협

30년간 살해 위협에 영국 정보 보호

서방 국가들 “충격, 비겁”

이슬람 신성 모독 논란을 일으킨 소설 ‘악마의 시’를 쓴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75)가 12일(현지 시각) 미국에서 강연을 앞두고 흉기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루슈디는 피습 직후 헬기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됐다. 긴급 치료 후, 인공호흡기를 떼고 대화할 수 있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 용의자는 이슬람 시아파 극단주의자인 하디 마타르(24)로 현장에서 체포돼 13일 기소됐다. 루슈디는 1988년 ‘악마의 시’를 출간한 뒤 30년 넘게 살해 위협을 받아왔다. 수사 당국은 이번 사건도 종교적 이유가 범행 동기가 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조선일보

소설 ‘악마의 시’를 쓴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지난 12일(현지 시각) 미국 뉴욕 셔터쿼 인스티튜션에서 강연을 앞두고 피습당해 쓰러지자 관계자들이 현장을 수습하고 있다. 루슈디는 팔 신경이 절단되고, 한쪽 눈을 실명할 가능성이 큰 상태다./로이터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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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슈디는 12일 오전 미국 뉴욕주(州) 휴양지인 셔터쿼 인스티튜션에서 강연을 하기 직전 무대 위로 돌진한 마타르가 휘두른 흉기에 목과 복부 등을 찔려 쓰러졌다. 진행자가 2500여 명의 관중에게 루슈디를 소개할 때 사건이 발생했다. 마타르는 무대 위 소파에 앉아 있던 루슈디에게 10차례 흉기를 휘둘렀다. 루슈디 측은 “팔 신경이 절단되고, 간도 흉기에 손상됐다”며 “한쪽 눈을 실명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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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뉴욕 셔터쿼 카운티 법정에 들어서는 용의자 하디 마타르(24)./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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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슈디는 1981년 소설 ‘한밤의 아이들’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을 받았다. 그가 1988년 발표한 ‘악마의 시’는 두 인도인이 비행기 테러 사고를 겪은 뒤 각자 천사와 악마의 영향을 받게 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으로, 환상과 우화를 뒤섞어 이슬람의 탄생 과정을 그렸다.

출간 직후 이슬람교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해 신성 모독을 했다며 이슬람권 국가에서 판매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소설에서 무함마드 아내 2명의 이름이 매춘부 이름으로 사용됐고, 책 제목인 ‘악마의 시’가 아랍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악마의 쿠란(이슬람 경전)’으로 읽히게 된다며 무슬림의 거센 반발을 샀다. 출간 이듬해인 1989년 이란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호메이니는 “(악마의 시) 내용을 알면서도 출판에 관여한 모든 자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며 루슈디는 물론 책을 출판한 이들도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파트와’(이슬람 율법에 따른 칙명)를 발표했다. 이후 루슈디는 24시간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도피와 은둔 생활을 해왔다.

루슈디 책을 번역하고 출판한 이들에 대한 공격도 잇따랐다. 일본에서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1991년 괴한의 흉기에 찔려 숨졌다. 노르웨이에서 이 책을 출판한 업자는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탈리아어 번역자도 흉기 공격을 받았다. 1998년 무함마드 하타미 당시 이란 대통령이 “루슈디에 대한 위협이 끝났다”고 공개적으로 밝혔지만, 2012년 이란 정부와 연계된 한 종교 재단은 루슈디에 대해 330만 달러(약 43억원)의 현상금을 내걸기도 했다. 루슈디는 2016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뉴욕에 거주해 왔다.

뉴욕주 셔터쿼 카운티의 제이슨 슈미트 지방검사장은 “용의자 하디 마타르는 보석 없이 구금됐고, 2급 살인 미수 및 폭행 혐의로 기소됐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사건은) 루슈디를 겨냥해 사전에 계획된 공격”이라고 했다. 미 NBC 방송은 “수사 기관이 마타르의 소셜미디어 글을 분석한 결과, 그는 시아파 극우 세력과 이란 혁명수비대 등에 동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 마타르의 국선 변호인은 “(마타르가) 수사 기관에 매우 협조적”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지만, 무죄를 주장한 이유에 대해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레바논 출신의 이민자인 마타르는 최근 미 캘리포니아에서 뉴저지주로 거처를 옮겼고, 위조된 운전 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었다. 그는 뉴저지의 복싱 체육관에 자주 다녔는데, 회원들은 “그가 조용하고 대부분 혼자 지냈다”고 CNN에 전했다. 체육관 관계자는 “마타르는 매일 ‘인생 최악의 날(worst day of life)’이라는 표정이었다”고 말했다.

이란 보수 강경 일간지인 카이한은 “변절자이자 사악한 루슈디를 공격한 용감하고 순종적인 이에게 1000개의 찬사를 보낸다. 원수의 목을 찢은 이의 손에 입을 맞추자”라고 했다. 이란 일간지 코라산은 ‘악마가 지옥으로 가다’라는 제목을 뽑았다. 이란 정부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슬람 무장조직 헤즈볼라도 “이 사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밝혔다.

서방 국가들은 이번 피습에 잇따라 규탄 성명을 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루슈디에 대한 사악한 공격에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라며 “진실, 용기, 회복력과 두려움 없이 사상을 공유하는 그의 역량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사회의 중요한 구성 요소”라고 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이번 공격이 “비열하고 비겁하다”고 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다른 사람들이 의견과 표현의 자유를 행사하는 데 대한 반응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악마의 시

부커상 수상자인 인도계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가 1988년 출간한 소설. 출간 직후부터 예언자 무함마드를 불경하게 묘사해 신성 모독을 했다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 이슬람권 국가에서 판매 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작가는 물론 책 출판에 관여한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이란 종교 지도자의 칙명까지 나왔다.

[워싱턴=이민석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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