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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팀의 감독은 한때 요미우리에서 함께 배터리를 이루었던 후지타(요미우리)와 모리(세이부). 둘 다 철저한 데이터 야구의 신봉자로 이른바 현미경 야구의 대명사였다. 하지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다고 승부는 예상과 달리 4전 전승 세이부의 일방적 승리로 끝이 났다.
1990년 10월 25일자 일본의 스포츠지 1면은 온통 세이부 우승 기사로 도배됐다. 승부의 고비가 된 1, 2차전에서 홈런을 날린 MVP 데스트라데의 인터뷰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이토의 눈물' 은 그 사이에 실린 조그만 박스 기사였다. 하지만 내게는 가장 눈길을 끈 기사였다.
1990년대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포수였던 이토는 그해 부상과 라이벌 오미야의 등장으로 힘든 시즌을 보냈다. 일본시리즈 상대 요미우리는 선수와 감독은 물론 세이부 팬들 모두가 넘기를 염원하는 거대한 산. 마침내 요미우리를 꺾고 우승을 확정지었을 때 이토는 통곡을 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그라운드에서 엉엉 울었다.
1999년 10월 20일 대구야구장. 삼성은 롯데에 충격적인 역전패를 당했다. 1승3패로 앞선 삼성은 5차전에서 9회말 롯데 호세에게 역전 끝내기 홈런을 허용했다. 6차전에서 마해영, 호세의 홈런으로 6-5 한 점차로 이긴 롯데는 7차전에서 9회 고(故) 임수혁의 극적인 동점 홈런으로 회생한 다음 연장전에서 승리를 움켜쥐었다.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명승부로 손꼽히는 플레이오프였다. 롯데 구단이 '응답하라 1999' 행사를 갖자 부산 팬들은 올 시즌 첫 사직구장 만원으로 호응할 정도로 당시의 감격은 엄연한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축제 분위기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린 선수가 있었다. 쌍방울에서 삼성으로 이적한 김기태(LG감독·당시 30세)였다. 김기태는 광주일고 1학년 때 황금사자기에서 우승한 후 15년째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었다.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그 한을 푸는가 싶었다. 트레이드와 생전 처음 해보는 외야수비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김기태. 우승으로 모든 것을 달래려던 그는 끝내 눈물을 내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