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겹쳐 쓴 북한 김정은 |
(서울=연합뉴스) 이성한 논설주간 = 2020년 9월 22일 연평도에서 실종된 한국 공무원이 북한 해안에서 북한군의 총에 맞고 시신까지 불태워지는 참혹한 일이 발생했다. 시신 훼손 만행에 한국은 물론 국제사회가 경악했다. 이에 북한 당국은 '국가비상방역규정'에 따라 해상에서 시신을 소각했다고 너무도 담담하게 밝혀 또 한 번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당시 북한은 외부로부터 바이러스의 침입을 막는다는 구실로 개미 한 마리 오가지 못하게 국경과 해안을 철저히 봉쇄하던 때였다. 북한은 일주일 뒤 대남 통지문에서 "불법 침입자가 사살된 것으로 판단했으며 침입자가 타고 있던 부유물은 국가비상방역규정에 따라 해상 현지에서 소각했다"고 사건 경위를 소상히 설명했다. 북한은 "가뜩이나 악성 비루스(바이러스) 병마 위협으로 고생하고 있는 남녘 동포들에게 도움은커녕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위로도 전해왔다.
코로나19가 '호환 마마'보다 무서운 북한의 경계 대상 1호였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북한은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퍼지기 시작한 2020년 3월 국경 봉쇄에 이어 8월에는 중국 단둥과 북한 신의주를 오가는 화물열차의 운행을 전면 중단했다. 북한 내 외교공관도 폐쇄하고 외교관들은 대부분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바이러스 차단을 위해 국경에 접근하는 사람은 물론 동물까지 무조건 사살토록 명령을 내렸던 것으로 정보당국은 파악했다. 실제 북·중 국경을 넘던 많은 밀수업자 등이 총에 맞아 사망했다. 2년 3개월 동안 청정 상태를 유지하며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던 봉쇄 정책은 최근 감염자 폭증으로 최대 위기에 빠졌다. 조선중앙통신 보도에 따르면 4월 말부터 누적 발열 환자는 148만3천여 명, 누적 사망자는 56명이다. 실제 사망자 수는 공식 발표보다 5~6배 많은 3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도 한때 하루 470명이 숨지고, 확진자 수가 62만 명까지 치솟았지만 남북한의 수치를 단순히 비교하긴 무리다. 남한의 경우 높은 백신 접종률에 힘입어 사회ㆍ경제 기능을 유지하면서 감염자가 정점을 찍고 안정적으로 관리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북한은 백신 접종률이 제로 상태다. 세계보건기구(WHO)를 비롯한 국제사회가 백신 보급을 타진했지만 북한은 봉쇄의 고삐를 죄며 응하지 않았다. 북·중 화물열차 운행도 올해 1월 중순에야 제한적으로 재개됐다. 꽁꽁 틀어막았다가 봇물이 터졌으니 속수무책으로 보인다.
북한의 완전 봉쇄 정책은 낙후된 의료체계를 감안한 고육지책이었다. 최근 발열 환자에게 내린 당 차원의 처방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기침이 나면 꿀을 먹으라거나 금은화(인동덩굴의 꽃봉오리)를 한번에 3~4g씩 또는 버드나무잎을 한 번에 4~5g씩 더운물에 우려서 하루에 3번 먹으라는 '고려치료방법'을 노동신문은 소개했다. 사실 버드나무는 아스피린의 주요 성분이 들어있어 예로부터 민간요법으로 쓰였지만 독성 등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감염병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코로나19 변이 바이러스의 높은 전파력을 고려할 때 북한,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의 봉쇄 일변도식 대응은 한계가 분명하다고 지적해왔다.
'건국 이래 대동란'이라는 북한의 코로나19 확산이 남북ㆍ북미 관계에 변수로 떠올랐다. 북한은 최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 뒤 단거리 탄도 미사일 3발을 연속 발사하고, 7차 핵실험 준비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르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전후해 핵실험을 재개할 것이라는 추측이 많았으나 현재로서는 코로나19 확산으로 주춤하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은 16일 시정연설에서 "코로나 위협에 노출된 북한 주민에게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면서 "북한 당국이 호응한다면 백신을 포함한 의약품, 의료기구, 보건 인력 등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 폭증이라는 최악의 악재가 오히려 꽉 막힌 남북관계에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자력갱생'을 강조하는 북한의 체면을 고려해 정교하게 접점을 찾아야 한다. 일방적으로 우리가 지원할 테니 받으라는 식으로 위기에 빠진 북한을 압박하면 화답을 끌어내기 힘들다. 직접 지원보다는 국제사회나 중국 등을 통한 우회 지원도 검토할만하다. 필요하다면 문재인 정부 때 터놓은 대북 라인을 활용하거나 물밑접촉을 통해 신뢰를 쌓는 방법도 생각해볼 수 있다.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대사건은 우연치않은 일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ofcours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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