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공연계로 확산되는 한류
10일(현지 시각) 프랑스 북서부 도시 렌의 브르타뉴 국립극장에서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연극‘빛의 제국’을 관람하고 있다. 한국어 대사로 연기하고, 프랑스어 자막을 곁들인 이날 공연이 끝난 뒤 프랑스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정철환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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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을 곧 시작합니다. 휴대폰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10일 오후 8시(현지 시각) 프랑스 북서부 도시 렌(Rennes)의 브르타뉴 국립극장(TNB). 갑작스런 한국어 안내에, 공연장 400여 석을 가득 메우고 웅성거리던 현지인 관객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지더니, 무대 위로 시선이 꽂혔다. 이날 작품은 한국에서 국립극단이 공연했던 연극 ‘빛의 제국(L’Empire des lumières)’. 김영하 작가가 2006년 쓴 동명(同名) 소설을 무대로 옮긴 작품으로, 서울에서 20년 넘게 ‘잊힌 존재’로 살아온 남파 간첩이 갑작스럽게 ‘귀환 명령’을 받고 서울에서의 삶을 24시간 동안 정리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았다. 지현준, 임윤비, 정승길 등 국립극단 출신의 유명 배우들이 총출동해 100% 한국어로 공연한다.
생소한 스토리와 낯선 배우, 이해할 수 없는 언어에 심지어 공연 안내 방송까지 한국의 ‘날것’을 가져온 작품이지만, 관객 반응은 뜨거웠다. 이날 공연을 본 세귀(30)씨는 “무대 위 자막으로 대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배우들의 연기력에 흠뻑 빠졌다”고 했고, 미리암(49)씨는 “자신의 희미한 존재를 되짚는 주인공 모습이 현대 사회에서 자기 정체성을 잃어가는 우리 모습을 드러낸 것 같아 상당한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2시간 10분간 이어진 배우들의 열연에 관객들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한국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의 프랑스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2017년과 올해 총 8000명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았다. 장-밥티스트 파스키에 TNB 프로덕션 국장은 “이렇게 큰 호응을 얻을 줄은 솔직히 몰랐다”고 했다. 지난달 27일 시작한 공연이 회를 거듭할수록 많은 관객을 모으고, 호평을 받으면서 프랑스 연극계에서는 “신종 코로나를 딛고 부활을 꿈꾸는 올해 연극 무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 하나”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달 중순부터 다음 달 초까지 발랑스와 마르세유, 보비니 등에서도 순회공연을 하고, 올 하반기에는 파리에 입성할 예정이다.
‘빛의 제국’의 조용한 성공은 케이 팝(K-POP)과 웹툰, 드라마 등으로 시작한 한류가 공연 예술 등 새로운 지평으로 확산하며 여러 방면에서 ‘업그레이드’하는 현실을 상징한다. 이날 공연장 앞에 길게 줄을 선 이들은 10대부터 70대까지 전 연령대에 고루 걸쳐 있었다. 이 연극의 기획과 연출을 맡은 아르튀르 노지시엘 TNB 극장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은 여전히 10~20대에 집중된 것이 사실”이라면서도 “한국에 대해 잘 모르는 위 세대는 이런 연극 같은 새로운 루트를 통해 한국 문화의 매력을 발견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공연장에서 만난 셀린(50)씨는 “BTS 팬인 딸아이 제안으로 별 생각 없이 왔는데, 내가 더 재미있게 봤다”며 “앞으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도 찾아볼 생각”이라고 했다.
언론과 문화 예술계의 시선도 달라졌다. 빛의 제국은 프랑스 대표 신문 르몽드와 유명 주간지 리베라시옹, 문화비평지 텔레라마 등으로부터 “수작(秀作)”이란 찬사를 받았다. 전해웅 파리 한국문화원장은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과 높은 평가가 대중음악과 드라마, 음식 등에 한정되지 않고 공연과 전시 등으로 확산하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며 “그만큼 한국 문화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고 했다. 단순한 재미를 넘어 ‘예술성’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서구 사회에서 높게 평가되는 일본 문화에 이어, 한국 문화가 유럽의 주류 사회로 서서히 진입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한국 문화가 예술성을 인정받는 저력은 ‘독특함’의 외피에 세계인에게 공통으로 호소하는 ‘보편성’을 제대로 담은 데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노지시엘 극장장은 “이 연극에서 분단 현실과 남파 간첩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유럽인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싶겠지만, 유럽 기성세대에겐 과거 냉전 시대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이를 새로운 공간과 인물, 상황을 통해 보는 신선함이 있다”고 했다.
[파리=정철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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