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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 (토)

이슈 [연재] 연합뉴스 '특파원 시선'

[특파원 시선] 푸틴이라는 '진창'에 빠진 이탈리아 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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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찬양하다 우크라 전쟁으로 역풍…우파 우세 정치지형 '흔들'

6월 지방선거·내년 3월 총선이 가늠자…우크라 변수 후폭풍 주목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코너에 몰린 이탈리아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오른쪽)
(프셰미실[폴란드] AP=연합뉴스) 지난 8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국경과 가까운 폴란드 프셰미실을 방문한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상원의원 앞에서 푸틴 티셔츠를 들어보이는 보이치에흐 바쿤 프셰미실 시장. 2022.3.31. photo@yna.co.kr



(로마=연합뉴스) 전성훈 특파원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달 8일(현지시간) 이탈리아의 극우 정치인 마테오 살비니 상원의원이 우크라이나 국경과 인접한 폴란드 도시 프셰미실을 찾았다.

실의에 빠진 우크라이나 피란민에 대한 지지와 연대를 보여주려는 나름의 계산된 행보였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망신만 톡톡히 당한 채 귀국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다.

보이치에흐 바쿤 프셰미실 시장은 살비니 면전에서 "국경에 있는 피란민센터에 함께 가서 당신 친구 푸틴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보여주고 싶다"고 일침을 놨다.

바쿤 시장은 푸틴 얼굴과 '푸틴의 군대'라는 글씨가 새겨진 티셔츠를 꺼내 흔들어 보이기도 했다.

2014년 살비니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붉은 광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군중들 사이에서는 "어릿광대" "집으로 돌아가라"는 등의 비아냥 섞인 외침이 쏟아졌다. 살비니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장면이 담긴 동영상은 이탈리아 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삽시간에 퍼지며 큰 화제를 모았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살비니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극우 정치세력이 처한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다.

이탈리아 극우 정당 동맹(Lega)을 이끄는 살비니는 유럽의 다른 포퓰리즘적 극우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노골적으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찬양해왔다.

반이민·난민 정서에 기대 정치적 지지를 얻어온 그는 2015년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유럽 차원에서 이민·난민 문제에 공동 대응하자고 촉구한 직후 자신의 SNS에 "마타렐라 두 명보다 푸틴 반쪽이 낫다"고 써 논란을 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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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이탈리아 방문 당시 총리 관저에서의 만찬 모습. 맨왼쪽이 당시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
[EPA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2019년에는 푸틴을 "지구상에 현존하는 최고의 정치인"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살비니와 같은 극우 정치인들이 푸틴과 밀착하는 것은 이들이 정치적 신조로 삼는 기독교적 가치와 백인 민족주의의 수호자로 푸틴을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세속·글로벌주의를 추구하는 '대서양 양안 블록'에 맞서는 국수주의·전통주의적 러시아와 이념적 동조 현상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다. 일각에서는 이를 '신유라시아니즘'(Neo-Eurasianis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거 이탈리아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공공연하게 주장해온 살비니로서는 푸틴을 든든한 이념적 후원자로 생각했을 법도 하다.

살비니가 러시아 방문 때 "유럽보다 이곳이 더 편하다"고 한 발언은 빈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러한 과거 언행이 지금은 부메랑이 되어 그의 정치적 운명을 옥죄는 형국이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을 계기로 최근에는 이탈리아 정가 안팎에서 동맹이 연루된 '러시아 게이트'도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미국 인터넷매체 버즈피드의 보도로 세상에 알려진 러시아 게이트는 2018년 살비니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당시 그의 측근이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측 인사를 만나 동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안을 논의했다는 의혹이다.

러시아 거대 에너지업체가 이탈리아에 15억 달러(현재 환율 기준 약 1조8천202억원) 상당의 연료를 기준가보다 낮은 가격에 판매하고 동맹이 그 차액에 해당하는 6천500만 달러(약 789억원)를 챙겨갔다는 줄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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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군 폭격에 뼈대만 남은 우크라 마리우폴 아파트
(마리우폴 로이터=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도시 마리우폴에서 30일(현지시간) 친(親)러시아 반군 병사가 무차별 폭격으로 뼈대만 남은 아파트 앞을 지나고 있다. 전략적 요충지인 마리우폴은 이달 초부터 포위 공격을 받아오다 도시 대부분을 러시아군과 친러 반군에게 점령당했다. 2022.3.31 sungok@yna.co.kr



물론 살비니는 지금까지 "단 1루블도 받지 않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정계 안팎에서는 푸틴과의 친밀한 관계를 들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 분위기도 존재한다.

살비니를 비롯한 이탈리아 극우 정치세력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내년 3월 총선을 불과 1년도 채 남겨두지 않은 시점에서 이러한 악재가 터졌다는 점이다.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반전 여론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만큼 지지율 하락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처지다.

일각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나비 효과'로 '우파 강세'로 특징되는 최근 수년간의 이탈리아 정치 지형이 일거에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정계의 시선은 당장 전국 1천여 곳의 행정수장을 뽑는 6·12 지방선거로 향하는 모양새다.

총선을 앞두고 각 정당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띠는 데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탈리아 정치 지형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대략 가늠해보는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살비니는 개전 이후 푸틴과 거리를 두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강하게 비난하는가 하면 푸틴이 이끄는 집권당 '통합 러시아'와 동맹 간 2017년 체결한 협력 협정을 연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동물적인 정치 감각을 지닌 그로서는 민심의 역풍 앞에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행보를 이탈리아 유권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두고 볼 일이다.

어찌 됐든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돌발 변수 앞에서 살비니와 그를 추종하는 극우 세력이 정치적 심판대 위에 섰다는 점은 명확하다는 게 현지 정치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luch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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