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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페퍼저축은행 김형실 감독 “고춧가루 팍팍 뿌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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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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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실 감독 | 세터 이현. KOV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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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 팀에 무슨 인터뷰냐.”

프로배구 페퍼저축은행의 김형실 감독(70)은 이 말로 기자와 인사했다. 2승22패. 2021~2022 V리그 3분의 2가 진행된 가운데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는 여자부 신생팀 페퍼저축은행의 성적이다. 언뜻 보면 올 시즌은 포기한 팀 아닌가 싶다. 그러나 페퍼저축은행의 분위기는 정반대다. 지난 18일 광주 페퍼스타디움에서 열린 IBK기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시즌 두 번째 승리이자 홈 첫승을 거뒀다. 이날 경기 뒤 페퍼저축은행 선수들은 마치 우승한 듯 기뻐했다. 지난 24일 경기 용인의 페퍼저축은행 연습장에서 김 감독과 올스타 선정 투표에서 6만2305표로 생애 첫 올스타전에 나선 세터 이현(21)을 만났다.

■“후보 선수들로 2승은 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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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페퍼저축은행 김형실 감독(오른쪽)과 이현이 지난 24일 연습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기도 용인 한 체육관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기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지윤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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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배구 여자부 꼴찌팀 감독
작년 초 급조된 팀 이끌며 성장
하나로 뭉쳐 거둔 ‘2승’ 기적 같아
남은 시즌 ‘고춧가루 부대’ 예고

생애 첫 올스타 멤버 뽑혔던 이현
“창단멤버 자부심 있지만 부담 커
17연패 끊고 홈 첫승 거둔 이후
연습 때 움직임이 달라져 있었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해 4월 한국배구연맹(KOVO) 이사회 승인으로 탄생했다. 현대건설을 제외한 나머지 5개팀에서 한 명씩 선발했고, 한국도로공사 자유계약선수(FA)로 나온 하혜진을 영입했다. 그러나 전국체전 등의 영향으로 6명이 처음 모인 건 6월, 전체 선수 16명이 모두 모여 처음 연습한 건 시즌 개막 5일 전이었다.

김 감독은 “지난해 4월 감독직을 맡은 뒤 번갯불에 콩 볶듯 준비도 없이 지금까지 왔다”며 “어떤 분들은 ‘기적’이라 얘기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GS칼텍스에서 팀을 옮긴 이현은 “지명을 받고 얼떨떨했다”며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싶었고 부담도 되고 두려움이 컸다”고 말했다.

급조된 프로구단 페퍼저축은행을 향한 배구계 안팎의 우려가 김 감독의 귀에도 닿았다. 김 감독은 “도쿄 올림픽으로 여자배구 붐이 일어났는데, 그 관심과 열기에 우리 팀이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며 “우리가 0-3으로 계속 지면 관중들이 재미 없어 하니 연습하고 다음 시즌부터 나오라는 요구도 많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도 시즌 개막 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다고 털어놨다. 김 감독은 “각 팀에서 보호 선수 9명을 제외하고 영입해야 하니 다들 경기 경험이 없는 후보 선수들이었다”면서 “그런데 시즌 첫 게임 KGC인삼공사전에서 첫 세트를 따며 분전했다. 주변 기대치가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해 11월5일 현대건설을 상대로 두 세트를 이겨 승점 1점을 기록했고, 다음 경기 기업은행과의 원정경기에서 첫승을 올렸다. 김 감독은 “기업은행이 조송화 사태로 어수선한 와중에 1승을 했다”면서 “선수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인기 구단이 됐다. 광주 시민들도 성적보다는 행복한 배구를 하라며 격려해줬다”고 말했다. 이현은 “솔직히 그때 우리가 이길지 몰랐다”며 “너무 빨리 1승을 해서 놀랐다”고 말했다. 팬들은 선수들을 위해 커피 트럭 등 각종 선물을 보냈고, 김 감독은 생애 첫 응원편지도 받았다.

그러나 기쁨은 길지 않았다. 이후 다시 패배가 이어졌고 좀처럼 반등하지 못했다. V리그 역대 세번째 최다 연패에 해당하는 17연패 수렁에 빠졌다. 이현은 “창단 멤버라는 자부심도 있었는데 시즌을 치르다 보니 부담 아닌 부담을 느껴 더 안 풀린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또 한 번 기업은행을 상대로 2승째, 홈 첫승을 거둔 선수들은 우승 세리머니를 하듯 김 감독에게 물을 뿌리며 즐거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현은 “2승을 하고 나니 그동안 쌓였던 안 좋은 마음이 다 날아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지는 습관, 열등의식을 갖고 있다가 오랜만에 승리하니까 선수들이 다시 살아나더라. 어제 연습 땐 움직임이 달라졌다. 공을 다루는 게 즐겁고 가벼워보였다”며 “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걸 선수들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말했다.

■“남은 시즌 고춧가루 될 것”

V리그 실전 경험이 거의 없는 열악한 선수층에도 불구하고 페퍼저축은행이 2승과 승점 8점을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자배구 장인’ 김 감독의 오랜 경험과 노력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역에서 은퇴한 김 감독은 1975년 미도파 코치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감독직은 태광산업(1986~1989)을 시작으로 담배인삼공사(1992~2006),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1997~1998, 2005, 2011~2012) 등 여자배구 지도자 경력만 약 40년에 달한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4강이라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김 감독은 여자배구의 매력을 남자배구보다 긴 랠리와 조직력으로 꼽았다. 그는 “여자배구는 철저한 기본기와 조직력이 필요한 종목”이라며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지난 18일 기업은행전에서)수비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는 칭찬을 받았는데, 수비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연습량의 60%를 수비에 치중한다. 연습을 많이 하고, 감을 잡고, 자신감이 생겨야 가능하다. 공격은 최후의 수단이다. 기본적으로 공을 받지 못하면 무슨 공격이 필요하겠느냐”고 말했다.

김 감독은 시즌 개막 전 구단에 3개년 계획을 전달했다. 올 시즌은 준비 과정으로 5승, 2년차인 다음 시즌은 중위권 도약, 3년차에는 정상에 도전한다는 계획이었다. 김 감독은 “아직은 공부하는 과정이다. 쇠도 처음에 많이 두드려야 단단해지듯 더 두드려 맞으려 한다”며 “페퍼저축은행을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팀)이 아닌 안정적이고 튼튼한 집(팀)으로 페퍼저축은행이란 정통성을 세우는 게 제 목표”라고 말했다. 김 감독은 이어 “남은 5·6라운드 고춧가루 부대가 되려 한다”고 했다.

김 감독은 연패 속에도 꿋꿋이 응원해준 팬과 광주 시민에게 감사를 전했다. 김 감독은 “지금까지 오는 데 정말 어려움이 많았지만 팬들이나 광주 시민 모두 관대하게 이해해주셨다”며 “부족한 팀 응원해주셔서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그 힘으로 2승을 하게 됐다. (화정 아이파크)아파트 사고로 우울하신 분도 계신데 지난 홈경기 승리가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으면 좋겠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31일 현대건설전에서 인사드리겠다”고 말했다.

김경학 기자 gomgo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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