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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유럽선수들 따라 잡으려… 스키 타고 산·들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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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동계올림픽 D-7] 노르딕복합 박제언

한국 처음이자 유일한 국가대표

크로스컨트리 유망주였지만 평창 올림픽 앞두고 종목 전환

홀로 유럽으로 가 ‘맨땅에 헤딩’

핀란드·오스트리아 대표팀에 ‘깍두기’로 얹혀 함께 훈련

“내가 타지에서 배워온 모든게 첫 메달 거름될 거라 믿어”

박제언(29·평창군청)은 늘 혼자다. 한국 유일한 노르딕복합 선수라서 그렇다. 훈련도, 대회도 혼자 한다. 혼자라고 허투루 하진 않는다. 지난해 혈혈단신으로 유럽에 ‘노르딕복합 유학’을 떠났다. 훈련, 장비 구매부터 숙박까지 모든 걸 직접 처리했다고 한다. 현재 유럽에 체류 중인 박제언은 최근 통화에서 “혼자 있는 게 편해서 오히려 좋다”고 했다.

높게는 110m를 하강해야 하는 스키점프에다, 저 멀리 펼쳐진 10km 설원을 스키로 달리는 크로스컨트리. 노르딕복합은 두 종목을 하루에 펼쳐 그 성적으로 순위를 매긴다.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요구하는 탓에 양성평등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올림픽에서도 아직 여자 종목이 없다. 올림픽 메달은 대부분 유럽에서 나오고, 아시아에서는 스키 점프 강국인 일본이 몇 차례 따낸 적이 있다.

박제언은 중·고등학교 시절엔 크로스컨트리 유망주였다.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가 결정되면서 노르딕복합에 한국 선수를 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 모였고, 수준급의 심폐지구력(크로스컨트리)과 하체 근력(스키점프)을 동시에 갖춘 박제언이 적합했다.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였던 아버지 박기호(59)씨도 설득에 가세해 2018년 평창에서 ‘한국 1호 올림픽 노르딕복합 선수’가 탄생했다. 비록 남자 개인 노멀힐·10km에서 30분56초5로 47명 중 46위에 머물렀지만, 한국 노르딕복합 역사에 첫 발자취로 남았다.

“평창 올림픽을 준비할 때는 아버지와 같이 훈련했어요. 아무것도 몰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함께 배워나갔어요. 본고장에 가서 배우고 싶어졌죠. 2020년 핀란드 대표팀과 함께 합숙할 기회가 왔어요. 예산 탓에 아버지를 두고 혼자 가야 해서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해보자’고 했어요.”

조선일보

지난해 8월 박제언이 핀란드 로바니에미시에서 유카 윌리풀리 핀란드 대표팀 코치의 지도 아래 바퀴 달린 스키로 평지를 달리는 모습. 핀란드 노르딕복합 선수들은 눈이 없는 여름엔 바퀴 달린 스키로 푸른 산과 들을 달리며 단련한다. ‘노르딕복합 유학’을 떠난 박제언도 그들과 똑같이 훈련했다. /박제언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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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방역 수칙 탓에 2020년은 국내에서 보낸 다음에야 지난해 1월 유럽으로 건너갔다. 박제언은 훔치듯 모든 걸 배웠다고 했다. 크로스컨트리 실력자가 많은 핀란드에선 어떻게 앞으로 나아가는지, 스키 점프 강국인 오스트리아에선 좋은 점프복을 고르는 걸 익혔다. “모든 합동 훈련을 다 혼자 조율하면서 따냈죠. 유럽으로 전지훈련을 온 일본 대표팀하고 할 땐 와타베 아키토(평창올림픽 은메달리스트)한테 ‘가족들 보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죠. 근데 ‘네가 가족을 더 보고 싶을 것 같은데?’라고 되묻더라고요. 본인은 대표팀 동료라도 있지, 저는 어떻게 혼자 다니느냐고요. 같이 웃었죠.”

훈련비뿐 아니라 숙박, 생활비까지 합하면 협회와 소속팀에서 나오는 지원비로는 부족하다. “요령이 생겼어요.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면서 가성비가 좋은 호텔에 인삼차를 선물해요. 다음에 그 나라를 가면 ‘인삼차 기억나느냐’고 그 호텔에 말하죠. 한 50유로(약 6만원) 정도는 깎을 수 있어요.” 독수공방하며 실력을 갈고 닦은 유학생은 지난해 12월 중국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2021-2022 시즌 노르딕복합 2차 콘티넨털 컵에서 남자 개인 노멀힐·10km 18위, 라지힐·10km에서 23위를 하는 등 2021년 콘티넨털컵 랭킹포인트 80명 중 30위 안에 들면서 2022 베이징 동계 올림픽 출전권을 얻었다.

만약 박제언이 평창 올림픽 후 다시 크로스컨트리에만 몰두했다면 더 높은 연봉과 큰 지원도 받을 수 있었다. ‘바보 같다’고 하자 박제언은 ‘하하’ 웃었다.

“흔들릴 때도 있죠. 그래도 돈 몇 천만 원보다는 제 마음이 말하는 대로 하고 싶었어요. 앞으로 돈 벌 날은 많잖아요.” 그는 자신을 노르딕복합의 선구자로 부르는 데 대해선 “성적이 주목 끌 만큼 좋지는 않으니까 ‘선구자’란 말은 부담스럽다. 조금 일찍 간 사람 정도가 좋겠다”고 했다.

박제언은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에서 스켈레톤을 처음 탔던 강광배(한국체대 교수)를 연상케 했다. 당시 다른 나라 선수들이 쓰던 중고 썰매를 빌려서 탔다던 강광배는 훗날 평창에서 압도적인 기량으로 금메달을 따낸 윤성빈을 발굴해 키워냈다. 박제언은 “내가 타지에서 ‘맨땅에 헤딩’으로 배워온 모든 것이 나중 한국에 노르딕복합 올림픽 메달의 거름이 될 거라 믿는다”고 했다.

‘올림픽 노르딕복합 금메달 ○○○!’ 멀지 않은 미래에 해설위원석에서 후배의 이름을 외치는 박제언을 상상해봤다.

[이영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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