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의사당 소실…집권 ANC 베테랑 인사, 헌법과 사법부 '공격'
지난 3일 불타고 있는 남아공 국회 건물 |
(요하네스버그=연합뉴스) 김성진 특파원 = 새해 벽두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헌법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1월 2일 남아공 국회 건물이 방화범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의사당이 불타버리는가 하면 집권 ANC(아프리카민족회의)의 한 베테랑 인사가 헌법과 사법부를 맹렬히 공격하고 나섰다.
린디웨 시술루(67) 관광부 장관이 지난 7일 올린 글이 일파만파로 논란을 일으켰다.
그는 인터넷 매체 IOL에 개인 명의의 오피니언으로 게재한 기고문에서 남아공 헌법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흑인 대중을 돌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남아공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안 다루고 고통만 조금 완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사법부가 로마법-네덜란드법의 법조문만 읊어대면서 역사적으로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시대부터 토지 등을 불법 점유한 백인 소수 독점계층의 권익을 옹호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흑인 법관들이 자신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백인을 추종하는 '하우스 니그로(house negro)'처럼 정신적으로 식민화됐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시술루 장관은 남아공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인 넬슨 만델라와 동급의 자유투사인 월터 시술루의 딸로 ANC에선 '성골'로 통하는 인사였기 때문에 더 충격이 컸다.
그는 백인 소수정권을 끝장낸 1994년 첫 다인종 민주선거부터 ANC 출신 국회의원을 내리 하고 1996년부터 입각해 정보, 주택, 외교, 국방 등 주요 장관직을 역임했으며 2001년부터 ANC의 핵심 멤버인 집행위원회 위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사법부에 대한 맹공격을 가한 시점이 문제였다.
레이먼드 존도 헌법재판소 소장 권한대행이 이전 제이콥 주마 정부 당시 ANC 간부들과 인도계 재벌 굽타 가문 등의 국정농단을 본격적으로 파헤친 사법조사위원회 보고서 1부를 처음으로 발간한 지 하루만이었기 때문이다.
헌재는 주마 전 대통령이 부패 사법조사위에 응하지 않자 지난해 7월 법정 모독 혐의 등으로 15개월형을 선고하고 그를 수감했다. 이는 남아공 법치의 시험대로 여겨졌으나 주마 전 대통령은 얼마 안 돼 법무부 장관의 조치로 의료적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과거 ANC의 반(反)아파르트헤이트(흑인차별정책) 투쟁 당시 정보담당관 출신인 시술루는 2017년 당내 대선 후보 경선 등에도 나왔으나 떨어졌다.
올해 12월에는 ANC 당대표 경선이 예정돼 있다. ANC 당대표는 다수당 출신으로 대통령에 자동 선출되며 시릴 라마포사 현 대통령이 재선을 노리고 있다.
이 때문에 시술루 장관의 '돌출' 행보는 다분히 연말 당내 경선에 나서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린디웨 시술루 남아공 관광부장관 |
표면상 급진 정책을 내세우는 당내 분파 급진경제전환(RET)의 대표 주자로 나서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술루는 지난 30년 가까이 집권 ANC의 주요 인사이자 헌법 수호를 선서하는 각료로만 20년을 근무한 터에 헌법을 공격한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많다. 1996년 발효된 남아공 헌법은 ANC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당초 행정을 책임진 여권이 만연한 부패로 주민들에게 기본 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한 터에 애먼 사법부를 손쉬운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존도 헌재소장 대행도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시술루 장관의 발언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일방적 비난이었다면서, 자신을 비롯해 흑인 법관들에 대한 최악의 모욕을 사과하고 기고문을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법무부 장관과 대통령실도 시술루 장관의 발언이 경솔한 언행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시술루 장관은 오히려 "헌법은 성경이 아니다"라며 연속 기고문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라마포사 대통령은 17일 대국민 주례 연설문에서 사법부의 독립성과 온전함에 대해 공격을 해선 안된다고 우회적으로 시술루 장관을 비판했으나 그를 직접적으로 질책하거나 일각의 요구대로 해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이 너무 무르다는 비판도 나온다.
남아공에선 시쳇말로 되는 것도 없고 안되는 것도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헌정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이래저래 되는 것이 없이는 남아공의 앞날이 밝을 순 없다.
sung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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