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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전두환 ‘녹화공작’ 국가책임 인정...“의문사 피해자에 5억2500만원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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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녹화선도공작의문사진상규명대책위 소속 유가족과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1월23일 서울 중구 군사망사고위원회 앞에서 의문사 김용권 사건 조사결과에 대한 군사망사고위원회의 발표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창길기자
전두환 정권의 ‘녹화·선도 공작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녹화공작 의문사 피해자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첫 사례이다.

7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서울지방법원 민사25부(재판장 이관용)는 지난 달 15일 피고 대한민국은 녹화사업 의문사 피해자 이윤성씨(성균관대 81학번) 유가족에게 총 5억2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녹화공작은 보안사령부(현 국군기무사령부)가 1982년 9월부터 1984년 12월까지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을 군에 강제 징집한 뒤, 시위계획 첩보 등을 수집하도록 강요한 일을 말한다. 국방부 군 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씨는 1981년 12월1일 직접 국방부 장관에게 소요 관련 학생들을 전방부대에 입영 조치하라고 지시했고, 보안사는 녹화공작 대상자 1121명의 명단을 작성해 이 중 1100여명을 강제 징집했다.

이씨는 녹화공작으로 징집됐다 의문사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1982년 11월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백골단’(경찰 사복체포조)에게 체포돼 군으로 끌려갔다. 2대 독자인 이씨는 당시 부친이 60세 이상의 고령이어서 현역입영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씨는 “군에 입대하지 않으면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에 육군5사단으로 입대했다. 입대 후 이씨는 운동권 출신 사병으로 분류돼 지속적인 감시를 받았다. 1983년 4월에는 학생운동 동료들의 활동 사항을 보고할 것을 강요받기도 했다.

이씨는 의가사 전역을 불과 8일 앞둔 같은 해 5월4일 사망했다. 헌병대는 이씨가 “불온 삐라와 책자를 소지해 월북을 기도한 혐의로 조사받던 중 처벌에 두려움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당시 헌병대의 발표는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시각은 헌병대에 의해 바뀌었고 삐라를 발견했다는 목격자 역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진술했다.

재판부는 이씨의 징집 자체가 당시 병역법을 위반한 강제징집이며, 징집 후에는 운동권 출신 사병으로 분류돼 프락치 활동을 강요받았다고 인정했다. 또 군이 이씨의 사망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사망 경위를 은폐하고 조작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의문사위원회의 결정이 있기까지 망인의 사망 경위까지도 철저히 은폐된 점, 조작된 사망 경위의 발표로 유족들의 고통이 배가된 점 등을 고려해 위자료 액수를 정했다”고 밝혔다.

녹화·선도공작 의문사 진상규명 대책위원회(대책위)는 “이번 판결은 녹화공작 의문사 발생과 이로 인한 피해에 대해 민사법정이 국가책임을 인정한 판결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평했다. 다만 “이번 판결에서도 사망에 이르게 된 경위에 대한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서 “이번 배상 조치로 실체규명 요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우려된다”고 밝혔다.

대칙위는 “이씨를 포함한 8명의 의문사 피해자에 대한 진상조사와 유관부처의 공식 사과를 요구한다”고 밝혔다. 이씨 외 녹화공작 의문사 피해자는 김두황(고려대 80학번), 김용권(서울대 83학번), 이진래(서울대 77학번), 정성희(연세대 81학번), 최온순(동국대 81학번), 최우혁(서울대 84학번), 한영현(한양대 81학번), 한희철(서울대 79학번)이다.

이홍근 기자 redroo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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