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A씨(35세)는 새해 은행 대출이 재개된다는 소식을 듣고 대출을 알아보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그동안 신용점수에 악영향을 준다고 해 현금서비스나 카드론 한번 받은 적 없었는데 신용점수가 높아 대출에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다. 마이너스 통장을 뚫으려 했지만 한 인터넷은행으로부터 '불가' 통보를 받았다.
은행들이 새해 들어 대출 영업을 속속 재개하고 있지만 고신용자들은 올해도 돈을 수월하게 원하는 만큼 빌리기 어려울 전망이다. 개인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가 강화되는 데다 작년보다 가계대출을 총량관리도 더 엄격해지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올해 가계대출 증가율은 4~5%대다. 강화된 규제 속에서도 중·저신용자 대출과 전세대출 등은 충분히 공급한다는 방침이어서 규제가 고신용자에 집중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2일 금융당국과 은행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은행 등 5대 시중은행이 올해 늘릴 수 있는 가계대출 총량한도는 31조5000억원으로 파악된다. 지난해 가계부채 관리 성적표에 따라 은행들은 4% 초반~후반대의 목표치를 부여받았다. 은행별 한도는 국민은행이 7조5000억원, 신한·하나은행이 각각 6조5000억원·6조원, 우리·농협은행은 6조원·5조5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5대 은행의 올해 총량 한도는 지난해 가계대출 공급액(약 42조원)보다 25% 가량 줄어든 규모다.
대출 한파 속에서도 중·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문턱은 지난해보다 낮아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이 올해 중·저신용자 대출과 정책서민금융상품은 총량 한도에서 일부 제외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면서다. 특히 전세대출과 집단대출 등 서민·실수요자 대출이 중단되는 일이 없도록 관리해 나갈 방침이다.
반대로 고신용자들은 상대적으로 대출을 받기 어려워진다. 작년보다 쪼그라든 총량한도 내에서 중·저신용자에 대한 대출 공급을 유지하면 고신용자 대출 등을 줄여야 한다. 지난해 4분기 총량관리 대상에서 제외됐던 전세대출도 올해 다시 총량관리 대상에 포함된다. 고신용자들이 대출 시장에서 '역차별'받는 왜곡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금융당국은 은행 가계대출에서 중·저신용자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올해 비중을 늘리더라도 다른 대출 취급량이 크게 줄진 않을 것으로 본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은행 중·저신용자 대출 비중이 약 3% 정도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올해 중·저신용자 대출을 늘리더라도 고신용자 대출에 미치는 영향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은행들의 설명은 다르다.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금융당국뿐 아니라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도 압박이 거세지고 있는 만큼 공격적으로 중·저신용자 대출을 늘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카카오뱅크가 지난해 10월부터 중단한 고신용자 대상 신용대출과 마이너스통장을 새해 들어서도 판매하지 않기로 한 게 실례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가계대출 규제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올해 중·저신용자 대출이 은행 성과를 가르는 요인이 될 수 있다"며 "총량한도로 줄어든 이자이익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은행들이 중·저신용자를 대상으로 한 영업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상환능력이 있는 고신용자들이 오히려 더 돈을 빌리기 어려운 아이러니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박광범 기자 socool@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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